정원이아빠
Lv.17
2012.10.23 10:31
댓글:8 조회:7,799
제게는 어딜 여행하든 다른 건 몰라도 그 지역의 밥집 몇 곳은 미리 챙겨두는 오래된 습관이 있습니다.
해외여행 뿐만 아니라 오래 전의 지방으로 떠나는 출장길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지요.
뭐, 남보다 준비성이 투철해서도 아니고, 유달리 먹는 걸 밝히는 탐식증 환자거나 미식가라서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갔던 그 곳을 훗날 더 잘 기억해두려는 나름의 방편인 것이지요.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만 불리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이미지도 더불어 저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1차적으론 허기를 채우는 게 우선이지만 그 다음엔 장소,사람,상황 등 여러 요소가 한데 딸려 옵니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나면 그제서야 주변 사물이 보이는 경험을 다들 한번쯤은 해보셨을테니까요.
그러니 특정 음식이나 밥집은 저처럼 머리가 과히 좋지 못한 이들에겐 또 하나의 보조기억장치 노릇을
톡톡히 하는 셈이지요.
우붓에서 며칠 머무르겠다면서도 숙소조차 정해 놓지 않은 제가 밥집만큼은 미리 점찍어두고 지도를 보며
길을 익힌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지요.
잘란 수그리와 로드에 있는 이 밥집을 처음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무모할 정도의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우붓의 저가숙소에 관한 정보를 담은 사이트를 뒤적이다 이니셜로만 나온 어느 이름모를 여행자의
숙소리뷰에서 알게된 밥집이었으니까요.
그 여행자의 설명은 저처럼 장황하지도 않았지만 조금도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숙소평가를 위주로 담는 사이트니 뭐라고 트집잡을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수그리와 로드에 있는 다유스 와룽이 맛있고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고 좋다." 달랑 이 한 줄의 문장...
대부분의 여행정보란 게 자기의 확고한 주관성을 가지고 올리는 글임은 익히 알지만서두(저도 마찬가지구요)
이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여다 볼 객관성이나 유추할 합리성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자꾸 눈이 갑니다.
마치 안 가면 무슨 큰 손해라도 볼 것 같은 느낌...
다른 분들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을 그 한 줄의 문장은 자꾸 눈에 밟히고 결국 저는,
"그래! 어디 한 번 가보자."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가 아닌 우붓에서 다유스 와룽 찾기를 결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붓은 사방팔방이 골목천지인 시골동네 입니다.
수 백, 수 천개의 골목이 만나거나 혹은 굽어져 연결된(물론 아주 운이 없으면 막다른 길도 만나게 됩니다.)
전형적인 옛날 마을의 모습이지요.
그래도 줄기를 이루는 큰 길이 몇 개 있는데 가로축의 잘란 라야 우붓과 세로축의 잘란 몽키 포레스트, 잘란 호프만이
바로 그 길들인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ㅠ"자형 마을이네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저렇게 생긴 공간 안에서 우붓을 체험합니다.
그러다보니 저 대로변에 대부분의 숙소와 밥집,기타등등이 집중되고 그 길에서 조금만 비껴나면 이내 한가로운 모습의
우붓, 제가 좋아하는 또다른 얼굴의 우붓을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물론 우붓은 큰 길조차 멋집니다.)
잘란 수그리와는 변두리임에도 다행히 멀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숙소가 잘란 호프만이니 오히려 가까웠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네요.
며칠 전 올린 짜장면,짬뽕없는 중국집 "와룽 끄레유"보단 조금 멀어도 거의 얼마 차이가 안 나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여장을 풀자마자 제일 먼저 간 곳이 이 곳이었습니다.
제 배꼽시계는 어디서든 한 치의 오차도 없으니까요.
숙소를 나와 오른편 블록으로 길을 건넜습니다.
그 블록의 바로 뒷길이 잘란 수그리와 로드니까요.
조금 올라가니 주택가 작은 사거리가 나오면서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기막힌 이정표 하나를 만났습니다.
한 손엔 파레트를 감아쥐고, 다른 한 손으론 유화용 붓을 쥔 우붓소년의 동상...
주택가 작은 골목 안에 우붓을 말해주는 또렷한 상징 하나를 숨겨두었더군요.
그 사거리 왼편길로 접어들자 길 좌우로 식당 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른쪽은 탁자와 장의자 몇 개만 갖다놓은 흔한 현지와룽인데 왼쪽은 언뜻 보기에도 형형한 포스를 발하는 모습입니다.
그 동네 웨스턴들은 죄다 모아놓은 듯, 밥때가 꽤 지난 시간임에도 앉을 자리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도대체 여긴 뭐야 ?"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아주 멋진 인테리어도 아닌 그냥 편한 느낌의 밥집인데...
아,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밥집이 아닌 "와룽 수파"라는 이름의 죽집이었습니다.
그것도 100% 유기농 순수 야채만으로의 차림표를 갖추었으니 눈밝은 서양 베지테리언 친구들이 죄다 모일 수 밖에요.
혹시 채식을 주로 하는 분라면 여기..., 이미 예사롭지 않은 포스도 압권이지만 들여다 본 차림표도 흐미...
야채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스프란 스프는 죄다 모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강추입니다. 어떤 경우엔 반드시 먹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중에 정원이 엄마와 함께 온다면 후한 점수를 딸만한 죽집 하나를 그 골목에서 덤으로 챙겼습니다.
헌데 제가 찾는 와룽 다유스는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게다가 이게 무슨 일입니까 ?
죽집에서 좀 더 올라가니 현지와룽 하나가 버젓이 간판을 달고 있는데 이런, 와룽 아유스입니다.
Dayus ? ... Ayus ? ...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딴 판인 밋밋한 느낌...
이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밥집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건 절대 아닌데 그냥 되돌아갈까 ?
그 여행자가 고의는 아니더라도 혹시 글자를 잘못 친 건 아닐까 ? 게다가 현지와룽이니 가격이 좋았다는 걸테구...
별별 생각이 다 들고 다리에 기운도 쪽 빠지는 찰나에 앞을 보니 대각선 방향으로 무언가가 보입니다.
큰 나무에 가려져 뚜렷한 실체는 잘 보이질 않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윽고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와룽 다유스를 드디어 찾아 온 것이지요.
사진 한 장 보지 못한 채 찾아온 와룽 다유스는 제가 기대한 이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무에서 갓 딴 과일들과 그림을 키낮은 정물화처럼 배치한 아랫층의 쿠션좌석...
탁 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람을 거느리고 있던 2층과 테라스.
안주인 아주머니는 주문보다 사진찍기에 급한 저를 가만히 미소로 지켜봅니다.
2층엔 북유럽풍의 아가씨 하나가 홀로 책을 읽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윽한 조용함은 밥집이 아니라 거의 절집수준입니다.
그늘 깊은 저 자리에서 그녀가 읽는 책은 뭘까 ?
궁금한 마음에 둘러보니 탁자마다 비치된 책 한 권씩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느 자리엔 허먼 멜빌의 백경이 그 옆자리엔 모파상 단편이 또 다른 자리엔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놓아 두었습니다. (... ... ...)
분위기는 막연히 제가 생각했었던 느낌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았는데 그다음은 맛일테지요.
그저 그렇다거나 영 보기와는 딴 판이라면 단 한 번의 방문으로도 족할테니까 말입니다.
저는 일단 나시 고랭 하나와 빈땅을 시켜 보았습니다.
신조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선 처음 가는 밥집의 맛을 밑반찬 김치로 가늠하듯이 여기 와서는 흔하고 만만한
나시 고랭으로 저는 판단합니다.
기본을 잘 하는 집은 뭐든지 잘 만들거라는 생각이지요.
아울러 나시 고랭은 맛이 없어도 억지로 한 그릇을 비워낼 수 있으니까 눈치볼 것도 없구요.
이윽고 내어 온 나시 고랭은 색달랐습니다.
계란을 부친 전처럼 위에 올려 내어온 것도 특색이지만 그 안의 다진 야채로 볶아 만든 밥 또한 특별한 맛입니다.
만 육천Rp로 맛보는 행복감을 제 혀가 먼저 알아본 것이지요.
하지만 변덕스런 저는 이내 아쉬운 후회를 하고 맙니다.
나중에 들어와 옆 좌석에 앉은 웨스턴 녀석의 셀러드가 제 것보다 훨씬 더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냥 느낌 하나 앞세워 찾아온 식당에서 저는 그 느낌의 일치감에 전율해버렸습니다.
우붓 변두리 작은 골목길...
테라스엔 바람이 말을 걸어오고, 그러다가 그 바람은 나무들과 맞은편 집앞 벤죨을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갑니다.
저는 조금씩 졸음에 겨워하다 어느덧 낮게 가라앉는 저물녘 햇살처럼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붓을 기억할 또 하나의 장소를 그렇게 만나고 갑니다.
하지만... 이 밥집, 언젠간 꼭 다시 돌아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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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겨울..저 꼭 그 그집에서 한가로운 풍경속의 한 점이 돼 바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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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찾아가셔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
말은 어둔하고 강연은 지루하여 조는 청중이 많았지만 그분의 수필이나 칼럼은 감미로우면서 날카로워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던 법철학자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정원이아빠님은 대화도 달변이시고 글 또한 어찌 이리도 달콤한지.... 우붓의 다유스를 방문하지 않으면 일생일대의 후회가 될 것 같은 느낌은 저만 느끼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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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메인페이지에는 "말은 어둔하고 강연은 지루하여..."까지만 보이길래
드디어 언티가 떴구나 싶어 냉큼 열어보니...
이거 칭찬인가요 ?
저는 달변에 달콤이면 사기꾼을 연상하는데...
아무튼
다금바리님도 나중에
우붓 드나드실 일 있거든
잠시 쉬었다 갈만 합니다.
급한 걸음이면
그냥 스쳐 가야겠지만... -
저도 처음가는 식당에선 나시고랭을 시켜보는데 그러는 분이 또 계셨군요
정원이아빠님 글은 항상 그림책을 보는듯 합니다
다만,,,,저같은 길치를 구원해주십사...지도에 점 큼지막하게 찍어서 첨부해주시면 정말 눈물나도록 고마울꺼 같습니다...
뭐...지도 보고도 못찾아가는 실력이긴 합니다만....이번엔 꼭 성공해보고 싶네요 -
Oh ! my god !!!
지도에 큼지막하게 점찍는 건 제 능력 밖인데...
제가 구글 어스하고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겠는데요.
그 방면의 달인 구파발님이거나
그 동네의 지키미 금홍이님이거나
두 분 다 이걸 미처 못 보고서 스쳐 지나가신다면
제가 서울가서
정원이 녀석에게 띄워 달라고 졸라야지요. -
Dayu's Warung
Jl Sugriwa no. 28X | Padang Tegal Mekar Sari, Ubud, Bali, Indonesia
081936203001
구글에서 검색하니까 트립어드바이저 리뷰들이 나오네요
http://www.tripadvisor.co.kr/Restaurant_Review-g297701-d1894660-Reviews-Dayu_s_Warung-Ubud_Bali.html
리뷰가 엄청 좋네요!! 저는 여길 꼭 가봐야겠습니다. -
다유라는 딸이 엄청 아팠던 모양이예요.
걔 엄마가 정성을 들여 음식으로 딸을 고치고선
그 레시피대로 차린 식당이니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닌 곳이지요.
찾기가 좀 힘들어서 그렇지...
꼭 가서 먹어볼 만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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