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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기
samui Lv.1
2008.04.28 21:14 추천:31 댓글:18 조회:4,561
balisurf.net



천국보다 그 여자


그 애를 처음 만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시카고의 어느 대학원에서였다. 한 눈에도 증세가 심각한 범생이었다. 강의시간이면 교수의 침이
정통으로 튀는 자리에 바른 자세로 앉아 5초에 한 번씩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저러다 자칫
목이라도 삐면 어쩌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역대 쟁쟁했던 엄마
친구 딸들 중에서도 저런 애는 없었다.

“부모님이 너무 엄해서, 서울에서는 공부 말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시간만큼 위대한 것은 세상에 없다. 어차피 우리는 학과에서 단 둘뿐인 한국여학생. 탐색과 증오,
체념의 시기를 거치며 점차 적응, 결국 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우린 정말 공통점이
많아. 안 그래? 친구는 가끔 이렇게 물으며 내 눈치를 살피곤 했다.

“나도 좀 데려가 줘. 짐이 되진 않도록 노력할 테니.”

어느 해 여름, 마침내 나는 그 애에게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세상을 보여 주기로 했다. 함께
발리(Bali)로 날아갔다.

“여태 네가 묵었던 미국이나 유럽의 호텔 같지는 않을 거야. 대신 방값이 싸니까.”

우리는 비용절감을 이유로 꾸따(Kuta)비치의 뒷골목, 어느 싸구려 로스멘(여인숙)에 투숙했다.
그늘진 방에 매트리스가 엉망인 침대 두 개, 천정에서 낡아빠진 선풍기가 삐걱대며 돌아가고
대낮부터 옆방 남녀의 교성이 울리는 그런 곳이다.

“물도 콸콸 나오고 화장실에 변기도 있고 훌륭하네 뭐. 이 값에 아침까지 준다니......”

친구는 신기한 표정으로 방을 돌아보았다. 좀 흥분한 것 같았다. 생전 피우지 않던 담배를
어디선가 사오더니 한 대 피워 물었다. 숙소에 어슬렁거리는 반나체의 쭉쭉 뻗은 유럽인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진을 찍어줘. 나 지금 너무 행복한데, 사진을 찍으면 그게 잡힐 것 같아.”

낙원을 찾아 몰려든 각국의 청춘들과 전설적인 석양풍경. 예나 지금이나 꾸따비치에는
얌전한 사람의 마음도 얼마든지 들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는 관광객들로 북적
대는 식당에서 아락(쌀로 빚은 술)칵테일을 몇 잔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좀 이상한 꿈을 꿨어.”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제공한 토스트와 커피, 바나나를 먹으며 그 애는 수줍게 털어놓았다.

“자다가 새벽녘에 잠이 깼는데 묘한 기분이 드는 거야. 어떤 남자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그럼 빽 소리라도 지르지 왜 가만히 있었니?”
“비명을 질러서 너를 깨우려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어쩌면 여기는 원래 그런 숙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이렇게 숙박비가 저렴한 거라고. 바보처럼, 여태 그것도
몰랐냐고 나를 나무랄까봐, 그리고 너는 너대로 한창 바쁠 텐데, 그래서 그냥 다시 잠을 청한
거야. 세상의 조금 험한 곳에는 이렇게 냉혹한 기브앤 테이크 시스템으로 구동되는 숙소도
있는 거야, 또 하나 배웠군, 하면서.”

알이 두꺼운 안경과 단정한 단발머리 너머로 아름다운 유머감각을 가진 소녀가 한 명
살고 있었다. 나는 이 진귀한 영혼에게 발리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는 이
섬을 대표하는 인기 관광지로 전락해 버린 중부의 우붓(Ubud)을 거쳐 조형미 넘치는
계단식 논풍경으로 가득 찬 띠르따강가(Tirtagangga), 동부의 흑사 해변 아멧(Amed),
그리고 항상 파랗게 빛나는 나의 비밀의 바닷가 파당바이(Padangbai)까지.

발리는 내가 사랑하는 섬이다. 어딜 가나 풍요로운 빛과 색채, 향기로 가득 찬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흰 깃발이 펄럭이는 푸르른 논, 머리와 두 팔에 묵직한
제례음식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는 전통의상차림의 여인네들, 오토바이를 수선하는
남자들, 나무그늘 아래 앉아 기타 줄을 튕겨대는 청년들, 그 틈을 뛰노는 갈색 아이들.
이처럼 아름다운 섬은 어딘가에 또 있을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섬은 어디에도
없다.

좀 더 순결한 자연을 찾아 우리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발리 옆 롬복(Lombok)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도착한 외딴 섬 길리 메노(Gili Meno). 나무로 대충
지은 오두막을 한 채 빌렸다. 일박 3달러.

“이 섬엔 민물이 없어. 수도꼭지를 틀어봤자 바닷물뿐이야.”

나는 샤워실-오두막 옆 노천공간-을 둘러보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모처럼 집으로 보내는 엽서에 자랑할 만한 잠자리는 못된다.

“.........정말 근사해.”

친구는 꿈이 깰까 무서운 사람처럼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렇게 멋있는 곳을 상상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자게 될 줄은 몰랐어. 완벽한 곳이야.

오두막은 바닷가에서 2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얼기설기 엮은 벽 틈으로 낮에는 바람이,
밤에는 파도소리를 타고 먼 하늘의 하얀 별빛이 넘나들었다.

“꼭 배를 탄 듯한 기분이야. 내일 아침 일어나면 세상 반대편에 닿아 있을 것 같은데.”

그 애가 말하자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누추한 잠자리가 별바다를 건너는 로맨틱한
선실로, 초라한 와룽(warung 간이식당)에서의 한 끼 식사가 천상의 만찬처럼 느껴졌다.
숙소 근처 가게에서 아락을 한 병 사가지고 오다 놓쳐 깨뜨렸을 때에도 마법의 주문은
풀리지 않았다. 우리는 깨어진 술병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앉아 폐부 깊숙이 알코올의
황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낮에는 섬 탐험을 했다. 덤불이 우거진 길리메노의 중앙부를 관통하여 섬 반대편까지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바다가 나왔다. 천국 같았다. 우리는 새처럼 자유롭도다!

그 애와 나는 연푸른 바닷가에 뛰어들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향해 헤엄쳤다.
오라는 곳은 없지만 부름 따윈 필요도 없도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우리는 서로 조율했다. 나는 전보다 눈에 띄게 얌전해지고
친구는 좀 사나워졌다.

“안 돼! 절대 돈 주지 마! 이 사기꾼아! 돈은 너에게 줄 게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겠다!”

섬에서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만난 악덕 뱃사공에게 친구는 나보다 더 큰 목청으로
이렇게 으르릉댔다. 이 추세로 가다간 손으로 코를 풀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았다.
가장 큰 취미가 독서이며 두 번째가 요리, 세 번째가 재봉질인 그 여자다운 애가
말이다.

그것이 내 친구의 첫 번째 아시아 여행이었다. 미국 동부에서 어느 대학 교수로 일하는
그  애는 나보다 며칠 앞서 발리를 떠나야 했다.

“너는 내심 이 순간만을 내내 기다렸겠지? 홀가분하게 혼자 여행할 수 있을 테니까.”

예나 지금이나 발리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섬이다. 무슨 핑계를 대든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갔다. 중요한 것 두고 온 사람처럼 떠나면 반드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해 여름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혼자 마시는 아락은 전에 없이 씁쓸했고 꾸따를
누비는 근육질의 예쁜이들은 어느새 내겐 너무 어렸다. 뒷골목 싸구려 로스멘에도
발길을 끊었다. 누추함을 단숨에 감춰버리는 마술의 지팡이, 그 놀랍고 신비한 재능이
나에겐 도저히 없기 때문에.

지금, 발리가, 그보다 그 애가 너무 그립다.




  • 청아 2008.04.28 22:12 추천
    '지금, 발리가, 그보다 그 애가 너무 그립다.'...
    이 말씀이 와닿습니다...
    저도 가끔 그 장소가 그립다기 보다는...그 공간을 함께 했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지금 내가 보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그리고 그 시간이 그립거든요...
    .
    .
    .
    그리고 책 잘 읽고 있습니다...
    ^^...
  • 앤. 2008.04.28 22:56 추천
    음.. 정말 소설책 읽는 기분.
    정말 글 기가막히게 쓰시네요!
    그리움이 팍팍 묻어나는 글입니다.
  • jirongi 2008.04.29 00:07 추천
    저도...갑자기 덩달아 그 애(?)가 보고싶은 rabbit (16).gif 건 왜일까요?
  • eunk77 2008.04.29 00:33 추천
    행복했던 발리 여행기를 눈으로 쫒으며 읽어내리다
    롬복에서 아찔했던 그 순간에 쥐고있던 책장이 구겨졌던 생각이 납니다.
    많은걸 다시 느끼고 또 배웠더랍니다^^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samui 2008.04.29 00:53 추천
    제 발리책을 읽은 분이 계시니 반갑습니다. 5월 중순에 다시 놀러갈 기회가 생겨서 갑자기 그 곳 생각이 났네요.
  • jerry141 2008.04.29 09:40 추천
    "내 지도의 열두방향 " 사서 읽을렵니다^^
  • 나야미모 2008.04.29 11:34 추천
    와....
    글 진짜 잘쓰신다...

    발리에 관한 한편의 엣세이라는 생각이 퍼득~ ^^
  • 친절봉사 2008.04.29 12:20 추천
    앗! 놀랍군요. 정말 박정석님 이시구나~

    `이달고` 잘있습니까?

    하우스에 하루라도 빨리 후회(?)하시길...
  • woodaisy 2008.04.29 13:33 추천
    어! 반갑습니다. 아쿠아에서 님의 글을 읽고는 부러웠는데 우리 발리섶에도 종종 님의글 볼 수 있었음 좋겠습니다.
    얼마전에 친절봉사님께서 소개해 주신 '용을 찾아서' 읽고 요새 하염없이 발리 그리워하고 있어요......내 담번에 발리가면 길리~는 못가도 빠당바이는 꼭 가보리라...
  • BLUE point 2008.04.29 15:55 추천
    글 잘쓰시네요~
    그곳에 제가 잠시 동행한 기분이드네요^^
  • K. 2008.04.30 11:09 추천
    글이...정말 ^^ drinking02.gifdrinking02.gifdrinking02.gifdrinking02.gifdrinking02.gif
  • 최영호 2008.04.30 11:18 추천
    우리 발리섭에 그림같은 글을 쓰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아련한 발리의 기억을 가슴아프게 흔들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다음 편을 기다립니다. applause1.gifapplause2.gifapplause2.gif
  • KSH3301 2008.04.30 16:41 추천
    그리워 목이 빠질것 같이 그리웠는데
    이 글을 읽고 마음에 편안해 지는 이유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 hyen03 2008.05.01 19:45 추천
    진짜 잘 읽었어요
    발리 여행 준비하고 있는데 제 친구와 이런 추억 만들 수 있음 좋겠어요 ^^
  • gamja 2008.05.06 11:59 추천
    빠당바이..........눈부신 그곳....꼭 다시 가봐야 할 곳.
    블루라군..뚠중즈쁜...의 스노클링...넘 예쁜 낚시배들..그리워라...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선물~!!!
  • 쿠들베베 2008.05.06 20:54 추천
    누군가와의 행복했던 여행지가 문뜩 떠오르네요..

    글을 읽다 보니...정말..발리로...발리(빨리) 가고 싶네요~^^
  • beenii 2008.05.27 19:14 추천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박정석님 글과 똑같아서요... ^^ 알고보니 samui님이 그분일줄이야.. 반갑습니다
  • shinchan 2011.04.10 01:31 추천
    근육질의 예쁜이들... 뒷골목의 싸구려 로멘스... 아 정말 글을 어쩜 이렇게 잘 쓰시는지... 마음을 뒤흔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