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정작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고즈넉이 걸어서 가야 한다.- [쟝 쟈크 루소의 "에밀"중에서]
- 딴중 베노아 항의 수많은 배들. 발리하이크루즈 선착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해변에 저런 작은 배들을 타고 스피어피싱이나
해양스포츠를 나가는데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비해 오히려 만족도는 꽤 높은 것 같다. 물보단 술과 더 친한(?) 나로서는
뜻하지않게 갓 잡은 싱싱한 회를 맘껏 먹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고...
이제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주섬주섬 입었던 옷가지들을 세탁실에 넣어놓고, 책들과 노트북,그리고 자질구레한 세면도구들을 제자리에 두고서
텅 빈 트렁크를 베란다에 내어다 놓았는데 아직 꺼내지못한 그 무엇이 남아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동안의 발리행은 늘상 가족 친지들을 동반해 분주하게 다녀왔던 터라 이번엔 혼자서 많은 걸 보고 느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주일간의 여정을 별다른 계획없이 발길닿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느슨하게 비워두었는데도 역시 실체없는 그리움을
거두지 못하는 걸 보면 이번 역시 그 한 조각을 그 곳에 남겨 두고 온 모양입니다.(또 다시 가야하는 이유가 되지요.ㅎㅎㅎ)
어쩌면 그것이 짧은 글재간으론 표현할 수 없는 발리의 마력(결코 매력이 아닌)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여행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 모두가 나와 같으리란 생각은 감히 하지를 않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 그리고 볼거리와 놀거리마저도 저마다가 느끼는 심정은 다들 똑같지 않은 이유로 인해
아예 처음부터 그 차이를 인정하고 여행길에 나서는 것이 차라리 나은 까닭입니다.
발리에 대한 저의 유난하고 각별한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겠지요.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은 혼자 다녔다는 것과 아울러 또다른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건 "신들의 섬'이라 불리는 발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는 겁니다.
그것도 짧은 여행길에서는 쉬이 만나기 어려운, 저마다의 색깔과 정을 지닌 사람들을 무더기로 말입니다.
물론 짧은 여정과 혼자라는 조건이 자칫 일상을 떠난 감상에다 좋은 의미의 덧칠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절대 스쳐 지나가는 일회성의 만남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서로가 올린 글로 인해 메일만 몇 번 주고 받았던 "와얀"(제가 형님뻘이라 감히 "님"자를
뺍니다. 당연히 와얀은 이해할거구요.)이나, 처음엔 그저 단순히 제가 묵게 될 "사양사양"의 무뚝뚝한 주인장으로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거의 40년쯤을 거슬러 올라간 제 초등학교 시절의 대선배님인 "분도형님"(이 대목에서는 나중에
제가 혼 좀 날 겁니다. 절대 본인 얘기 하지말라셨는데... 하지만 그동안 지켜본 모습은 과묵모드의 속깊은 분이더군요.)
그리고 젊은 나이에 발리를 배경으로 큰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다혈질의 "앤디"로 인해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저 또한 그들에게 함께 있는 시간에 작은 기쁨이라도 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할 따름입니다.
- 현지인 동네 깊숙히 자리잡은 "사양사양"은 초행길에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한 번은 사누르의 초입에서 택시를
내려 물어물어 숙소까지 걸어봤는데 결과적으론 족히 40분이상이나 걸리는 괜한 짓을 했다. 숙소로 가는 길의 절반쯤
지나면 바닷가가 면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뜬금없이 "해양경찰학교"가 나온다.
- 해양경찰학교 담벼락을 보면서 걷다가 마치 포세이돈 같은 포즈로 범선을 딛고 선 힌두의 바다신을 만났다. 챨칵. -
09. 08.28(목)
신종플루 경계령때문에 잘 다녀오라는 인사대신 마누라의 지청구와 함께 "아빠! 귀국하실때는 보건소부터 들려오세요"라는
정원이 녀석의 악담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두 달도 채 안되서 다시 가는 길이니 뭐 새로울 거야 없지만 그래도 가족들의 안위나 뭘 할까?를 신경써야 하는 피곤함은
없으니 그래도 제법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일상적인 비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많은 신종플루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항은 한산한데 생각보다 리무진 버스가 늦게
도착한 까닭에 발권과 수화물 탁송을 금방 끝냈는데도 보딩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이내 뛰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3층출국장의 반대편 방향 맨 끝쪽에 있는 어비스 카운터에 가서 예약한 임대폰을(이번 여행에 너무 유용했습니다.
도난분실보험료 포함 2만 6천원의 가격도 적정하고 국내통화 30분과 무제한 착신무료의 조건입니다.)받아 모노레일을
타고 게이트에 도착하니 막 보딩이 시작되네요.
기내는 그동안의 발리행중 가장 손님이 적어 보여 과장 좀 보태면 1줄당 2~3명 정도로 쾌적했습니다.
게다가 기류의 영향으로 30분 정도 이르게 덴파사공항에 도착했고,마침내 난생처음으로 줄서는 일 없이 비자를 사서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데까지 채 20분도 안 걸린 것 같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철석같이 이번 여행의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지요.)
- 홈스테이에 묵는 동안 신주단지처럼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닌 "사양사양"의 명함 앞 뒤./현지기사들이 약도를 보면
왠만하면 다들 정확히 내려준다. 드물게 못찾고 헤매는 경우엔 앞면의 집전화와 핸드폰 전화로 S.O.S. -
- "사양사양"의 마스코트인 두살박이 "아구스"와 홈스테이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엄마 "까덱" /밖을 돌아다니다 들어오면
언제든지 눈맑은 "아구스"의 재롱을 만끽할 수 있다. 단 부끄럼을 잘 타고 초기엔 낯가림도 하니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빨리 친해져라. 백만불짜리 뽀뽀도 받을 수 있다. -
- "아구스"와 그의 아빠 "뇨만"/눈에 띄지않게 집안 일을 거들며 말없이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착한 가장이다. -
하지만 바로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너무 빨리 빠져나오는 바람에 평소처럼 제시각에 도착할 것을 예상한 "사양사양'의 픽업은 아직 나오질 않았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만에 만나는 공항밖은 낯익은 풍경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피켓을 주욱 들고 늘어선 채 팩키지손님을 마중나온 가이드들 중에는 예전에 저희 가족과 함께 했던 낯익은
친구들이 죄다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이번엔 혼자시네요."
반갑다고 그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30분쯤 경과했는데도 "사양사양"의 픽업은 보이질 않습니다.
서서히 불안해지는 마음과 함께 "혹시 이러다가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조바심도 들구요.
나름 궁리를 해보니 메일만 주고 받았을 뿐 전화번호를 지닌 게 없으니 천상 다시 메일을 보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고,
그러자니 문득 떠오른 게 발리갤러리아 앞의 라벤더호텔 2층 인터넷룸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 나니 가급적 빨리 움직여야겠더라구요.
택시서비스 카운터엘 가서 DSF갤러리아로 간다고 했더니(라벤더는 아는 기사가 거의 없습니다.)이내 배차를 해주더군요.
헌데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니 어라, 가는 방향이 좀 틀려집니다.
바이파스를 타고 주욱 직진만 하면 갤러리아인데 이 차는 좌회전을 하더니 투반 쪽으로 가는거예요.
처음엔 지름길로 가겠거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이 기사녀석 얼마 안 가서 절더러 내리라더군요. 다 왔다고...
창밖을 보니 왠걸 "플라쟈 발리" 앞이 아니겠습니까?
"여기가 아니다. 난 DFS 갤러리아로 간다." 그랬더니 녀석 왈 "여기가 duty free shop이예요."(흐미 환장하겠네요.)
몇 번의 설명끝에 녀석은 제 말을 알아듣는데(나중에 알았지만 DFS갤러리아라고 하면 잘 모르고 이사람들은 그 곳을
발리갤러리아라고 부른답니다.) 이번에는 거긴 챠지를 더 내야한다는 겁니다.
이미 공항에서 가격흥정(4만 5천루피)까지 다 마치고 탔는데 서서히 화가 치밀더라구요.
그런 제 목소리가 높아지자 녀석은 그제서야 "Be Quiet. 받은 돈대로 그냥 갈게요."라는 대답을 하더군요.
(저 역시 내릴 때는 미안해서 결국 5천루피를 팁으로 줬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라벤더에 들어와 로비 한 켠에 짐을 부려놓고 인터넷룸엘 올라갔는데 ,이젠 한글변환이 안되는
자판과 그 놈의 느려터진 속도가 속을 썩히는 겁니다.
결국 "help me"라는 제목으로 라벤더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픽업해달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지만 좀처럼 연락은
없더군요.
이젠 슬슬 배도 고파지기 시작하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어 결국 "와얀'을 떠올렸고, 예전에 발리서프를 통한 귀동냥으로
알아뒀던 곳에 전화를 걸어 찾았는데 때마침 부재중이라네요.
정원이 아빠가 지금 발리에 도착했는데 픽업이 어긋나서 그러니 전해달라는 용건으로 전화를 끊었는데 다행히 빨리 전달이
되었고 마침 그가 "사양사양"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어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습니다.
드디어 주인장과의 통화엔 성공했지만 도대체 안 기다리고 어딜 갔느냐?는 핀잔부터 듣고 곧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발리의 좁은 도로망과 교통체증으로 결국 공항을 나선지 4시간이 지나서야 국제미아(?)가 될 뻔한 위기로부터 구조되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곰곰 생각해보니 제가 초행길이었다면 무조건 공항에서 사람이 나올 때 까지 기다렸을 겁니다.
좀 와봤다고, 좀 안다고 그래서 이 정도는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적당한 건방짐이 첫 날부터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샘플 케이스가 된 것이지요. (그러고보면 우리네 삶도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겠네요.)
- "사양사양"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초입. 저 안쪽 골목끝에서 좌측으로 돌면 숨어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 마당에서 내 방으로 들어가는 안쪽복도의 문이 열려있다. 왼쪽 수영장에서도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으니 편한대로
아무 쪽이나 출입이 가능하다. 전면의 마주 보이는 문은 욕실인데 이문의 좌측으로 방이 둘 있고 우측은 화장실 공간이다.
복도 안 입구에서 좌측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2층 방도 있다. -
- 위 사진의 좌측부분인 보이지 않았던 수영장의 모습./두 개의 베드가 놓여진 작은 문이 내 방의 또다른 출구이고
큰 문은 옆 방이다. 창문이 있는 2층에도 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측의 독립가옥은 별채.-
- "사양사양"에서는 숨은그림찾기를 할 수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몇 점이 안되는 그림들은 늘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 눈에 잘 안 띌 뿐. 하지만 바빴던 마음의 켜를 조금만 덜어내고 나면 가까이에 함께 있는 그림들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사양사양"의 드러나지 않는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이미 어둠이 깊게 깔린 9시가 거의 다 될 무렵에야 숙소엘 도착했는데 나름 걱정이 되셨는지 주인장이 나와 계시더군요.
라벤더 호텔로 차를 가지고 저를 마중나왔던 앤디 역시 그때까지 빈 속이었고 저역시 거의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것을
알아차리셨는지 무뚝뚝한 첫 일성이 짐은 나중에 풀고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공항 가까운 투반의 로컬식당인 "아얌바뚜뚜"
현지 전통식으로 된 아얌(닭)요리를 내어놓는 집인데 식사가 나오자 밑반찬인 깡꿍과 땅콩을 접시에 모두 쏟아 붓고서
손가락으로 버무려 맛있게 드시는 "사양사양"주인장 분도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만 기세가 또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 아얌 바뚜뚜의 네온사인 입간판/만만찮은 매운 맛으로 현지인들은 밤시간이면 자리를 다 채우지만 결코 우리 입에는
만만한 음식이 아니라는 게 솔직한 느낌이었다.-
- 식당 안과 바깥이 모두 손님들로 분주하다./현지인에게는 꽤나 소문난 로컬 레스토랑이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추천하긴 어렵다.(글로벌한 입맛의 소유자만 예외) -
몇 번인가 발리를 찾게되면서 그다지 뚜렷하고 구체적인 이유없이 발리를 좋아하게 된 게 혹시 제가 전생에 발리인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하고 치기어린 생각을 한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윤회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저이지만 정말 전생과 윤회가 가능한 거라면 그리고 그게 발리인에 국한된
언급이라면 필경 저보다는 분도형님이 몇 곱절 더 위에 있음을 그 한 장면의 목격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은 머무는
내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작아지거나 잘 못 봤다는 수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투반의 허름한 식당, 목로탁자에 앉아 발리의 첫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지나가면서도 머하는곳인지 몰랐어요...
후~~~창피합니다...........( _.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