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아빠
Lv.17
2009.09.04 15:04
추천:8 댓글:4 조회:4,349
가는 것 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또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어도
그냥 가거라. - 고은의 [그대 순례] -
- 방파제 길 저너머로 바다가 보입니다. 정박된 배들은 언제든지 비끄러맨 한줄 로프만 풀면
출항의 채비를 갖추는데 우리의 떠남과 돌아옴은 과히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지않는 마음줄로 너무도 단단하게 동여맨 까닭일까요? -
09.08.30(토)
된장 찌개 끓이는 냄새가 구수한 아침입니다.
식전 커피를 즐기는 저로서는 눈을 뜨면 맨처음 부억으로 가 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아침상을
엿보는 것도 나름 작은 즐거움이 됩니다.
특별히 서두를 일이 없으니 아침을 먹고나도 노트북을 열고 받은 메일을 확인하다가 다시 책 한 권을 쥐면 그만입니다.
"우붓이나 다녀올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헌데 엇저녁 함께 들어오면서 까르푸에서 장을 본 게 문득 떠올랐습니다.
오늘 점심으로 퍼스 새댁이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만든다고 이것저것 재료들을 샀던 겁니다.
더군다나 새댁이 셰프과정을 수련중이라는 말도 언뜻 들은 바 있어 느즈막히 가야하는 우붓행은 내일로 미루기로 햇습니다.
먹는 데에 있어서는 나눔보다는 받기에 아주 익숙한 터라 짐짓 거절할 수 없다는 표정까지 짓고서 말이지요.
결론은 아주 대만족이었습니다.
미래의 쉐프가 만들어 내어 놓은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는 풍성한 양과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웃기가 눈과 배를 모두
즐겁게 합니다.
- 까르보나라 스파게티 관련사진이 없어,읽는 분들 눈이라도 즐거우시라고 궁색하게 대신 올린 딴중베노아 선착장 -
알고보니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돼서 점심을 서두른 건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만 제외하고 다들 딴중베노아로 스피어피싱과 스노클링을 나가기로 미리 일정이 잡혀 있었던 거죠.
아무 것도 급할 게 없고, 할 일 없이 소일하는 듯한 제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분도형님은 또다시
"바다나 같이 갑시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제서야 말이지만 쌩판 초짜들만 모인 관광객들과 함께였다면 처음부터 제가 바다를 청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함께 지내며 귀동냥으로 들은 바로는 분도형님에 앤디,다이빙강사인 K양은 말할 것도 없고,
퍼스부부까지도 라이센스를 보유하고 슈트까지 준비한 최소한의 세미프로급 이상이었습니다.
함께 따라갔다가는 어줍잖은 저때문에 오히려 판을(?) 망치지나 않을까 싶어 저어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내 곧 "에라 모르겠다. 가서 구경이나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따라나섰습니다.
- 우리가 탄 배는 바다 한 가운데의 포인트에 도착하자 모두들 서둘러 물 속으로 텀벙 텀벙!!!/함께 따라온 이웃 배에서는
그제서야 천천히 핀을 신고 입수준비가 한창이다. 다행인건 모두들 슈트를 착용해 누가 누군지 모르니 초상권침해 운운에
휘말릴 일은 없을 듯 하다. -
딴중 베노아의 바다는 이 날따라 앞으로 나아갈수록 파도가 꽤 드세었습니다.
소형 모터 하나로 운신하는 동력선이라 밀려드는 제법 높은 파도에 움찔하며 배가 기울어지면서 균형을 잃기도 했지만
배는 다행히 스피어피싱과 스노클링에 적합한 포인트를 찾아 닻을 내렷습니다.
위에 언급한대로 우리 일행이야 다들 물만난 고기이니 자리를 잡자마자 그냥 뛰어내리더군요.
이거 딴중베노아의 바다 한 가운데서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렸습니다. ㅎㅎㅎ(엄밀히 말하면 현지인 선원녀석 하나가
함께 남아있긴 하네요.)
혼자 있는 시간이 제법 길어지면서 무료한 생각이 들자 결국 저역시 스노클을 착용하고 바다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현장에서 제가 봤을 때,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건 프로, 뱃머리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붙들고 조심스레 내려가는 건
초보 아마츄어더라구요. 입수 동작의 차이처럼 표현의 차이도 큽니다.)
고요한 바닷속은 그야말로 별천지 세상이었습니다.(방수카메라가 없는 게 한이더군요.)
크고 작은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종횡으로 오가는 옅은 녹색의 공간이 끝 간데 없이 펼쳐진 모습...
그래서 그들이 바다로 뛰어든 단 하나의 이유를 살짝 엿보았습니다.
- 나보다 어르신이라면 변 훈선생의 가곡"떠나가는 배"를 떠올릴 정경./ 난 당근 아직 젊으니까(?) 조동진의
"배 떠나가네" 정도가 생각나더라. -
이웃한 배에서 내린 분들도 생각보단 여유있게 스노클링을 즐겼지만 우리 일행은 도무지 올라올 생각들을 안하더군요.
그러다 아쉬운 듯 하나 둘 돌아왔는데, 특히 분도형님은 말씀은 안하셔도 피싱건으로 잡은 물고기의 수확량이 못내
성에 차지않는 표정이었습니다.
헌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조금도 불안해 하지 않고 "때되면 오겠지"싶은
생각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점점 바닷바람이 심해지면서 "모두들 추워죽겠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달래도 몇 번이나 "조금만 더 잡고"를
외쳤던 분, 바로 다금바리님 이셨더라구요.
발리서프 마당을 통해 이름만 눈에 익다가 이 곳엘 와서 앤디로부터 거의 절대적 숭배(?)의 대상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얘기도 몇 번인가 들었지만 오늘 이렇게 뵐 줄은 몰랐던 겁니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듯 돌아온 그의 표정 역시 썩 밝지만은 않았고 쑥스럽게 "오늘은 고기가 별로 잡히질 않네요"라고
말을 하는 그의 손엔 1M쯤 되어보이는 작은 상어 한 마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 망망대해에 부표처럼 떠있는 저 표식이 바로 저 바다밑에서 다금바리님이 피싱건으로 고기를 잡고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 석양을 비껴 안고 귀항한 우리 배(좌측 끝)를 함께 간 선원녀석이 정박시키고 있다. 헌데 방파제에 나와 앉아 물끄러미
지켜보는 저 젊은 여인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저 녀석의 새 신부란다. 낭군의 귀항때마다 해질녘 바다에 나와 앉은
여인의 사연은 순간 저 허름한 녀석이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처럼 부러웠다. 살아있는 망부석의 모드이다.
육지로 돌아와 처음 출발했던 장소의 간이식당에다 자리를 폅니다.(제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 온거죠.)
사실 갓 잡아올린 생선을 이미 뱃머리에서 회를 쳐 바다에서 먹으려 했지만 쌀쌀하게 급변하는 일기로 인해
편안모드로 바뀐 겁니다.
옹색한 테이블이지만 신선해 보이는 각종 쌈야채와 미리 준비한 듯한 고추장과 와사비장까지 갖추니 손색없는
발리 횟집입니다.
잡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란 말처럼 우리 일행은 저처럼 걸신들린 회매니아가 없는 지라 그때부턴 아마도
거의 제가 독식을 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분도형님과 다금바리님 두 분 어르신은 술도 안 하시니 역시 오늘도 확실하게 폐만 끼친 듯 합니다.
- 금새 어둠이 짙어지면서 육지를 향해 서둘러 들어오는 배들.-
- 육지로 들어온 배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저마다 분주한 손놀림으로 안식을 준비하고 있다.-
모처럼의 회도 저를 빼놓고선 다들 요기가 안된 까닭에 오는 길에 다시 "아얌빠뚜뚜"엘 들렀습니다.
그제의 늦은 저녁방문 보다 이른 피크타임이라서인지 정말 현지인들로 내부엔 마땅히 앉을 자리조차 없더군요.
이미 회가 들어가 포만감으로 늘어진 제 배는 더이상의 식탐을 부릴 수 없어(게다가 과히 좋아하지 않는 쟝르의
현지식이니까) 자제모드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매콤한 아얌요리를 달래주는 후식인 이 집의 수제 아이스크림은 마다할 수 없었지요.
식도락기행의 세번째 날도 무사히 저물어 갑니다.
- 현지인들로 꽉 들어찬 "아얌바뚜뚜"의 내부. 바람이 시원한 바깥 테이블이 더 좋던데. -
정녕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