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아빠
Lv.17
2011.02.14 17:28
추천:3 댓글:7 조회:3,165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박 완서 선생의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중에서
PS : 발리에서 돌아온 다음 다음 날 박 완서 선생께서 담낭암으로 돌아가셨더랬습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박 경리 선생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그 분들을 "여류 소설가"로 한정짓지는 않습니다.
한류란 말은 있어도 남류란 말은 애시당초 없는데 무슨 여류입니까 ?
하물며 어지간한 당대의 남자 소설가보다 천착한 깊이와 넓이의 영역이 더 심대한대 케케묵은 봉건적 조어인 "여류"의
올가미에 가둬 놓아서는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차별을 차이로 호도하는 "구분지음"은 이제 없어져야 합니다.
- 바다를 코 앞에 둔 르 마요르 미술관은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는 모든 것이 정지된 공간이다.
해변가 산책로에 있음에도 멋모르고 스쳐 지나가기에 딱인 전혀 미술관같지 않은 외양이니 햇살좋은 날에도 방문객은
있을 리 없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전통가옥 구조를 닮은 내부와 빈약한 작품 수, 그리고 웰컴드링크 한 잔 없는 작고
초라한 미술관이다보니 늘 입장료는 5천Rp...
하지만 여기는 조국을 떠나 한 평생을 이국땅에서 보내야했던 어느 노화가의 예술혼이 말을 건네오는 장소이다.
그대가 침묵하면 바다가 대신 화답하는 곳이다.
그동안 우기 시즌임에도 운좋게 잘도 비를 피해 다녔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제법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까지 들이쳐 일하는 이들은 창문을 닫고 바닥을 닦느라 분주합니다.
다행히 정원이는 간밤에 푹 자더니만 하룻만에 다시 똘망똘망 해졌습니다.
오히려 제가 잠이 안 와 뒤척이다가, 밤늦게까지 담소하는 무려 일주일만에 처음 들어온 젊은 일행들과 죽이 맞아서
잠을 설친 까닭에 머리가 개운칠 않습니다.
그래도 일정으론 오늘이 마지막 날인지라 대충 씻고나선 우중마실을 나섭니다.
사누르 바닷가에도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배들은 튼튼한 로프로 모두 비끄러매어 있고, 그 넓은 해변길에 인적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런 호젓함 때문인지 르 마요르를 향해서 가는 길에 문득 또다른 화가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 성질상 알고보면 서로 겹치고 교류하는 부분이 꽤 많은데 지금은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 화가도
그림이 아닌 소설의 영역에서 흥미를 자아낸 부분또한 일정 있다고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그 소설이 한 신인작가의 첫 작품(처녀작이란 말도 성차별적인 단어이기에 삼가합니다.)이자 이후 대가가 된
그의 대표작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소설의 내용은 픽션이지만 그 안을 관통하는 흐름은 넌 픽션이나 다름없습니다.
6.25 전쟁직후 서울의 명동 미군PX 초상화 가게에서 일했던 주인공 옥희도의 이야기 ...
그렇습니다. 바로 그가 지금은 국민화가로 칭송되는 박 수근 선생이고, 그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가 1970년에
소설 "나목"으로 등단한 박 완서 선생이니까요.
일제 강점기에 간신히 소학교만 나와 한평생을 찌든 가난 속에 살다간 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먹고 살기위해 닥치는대로 미군들의 초상화만 그려댔으니 화가라고 부르는 것도 어쩌면 고상한 사치일런지 모릅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아닌 원치않는 그림을 그려야하는 화가의 아픔...
그림값 대신 물감을 받고서도 좋아라하며 그린 자신의 혼이 담긴 그림은 정작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
그가 남긴 작품들은 수 억이 아닌 수 십억을 호가하는 거의 문화재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문학과 연결된 또다른 화가도 한 명 소개하지요.
1919년 영국의 소설가 서머셋 모엄은 "달과 6펜스"라는 작품에서 한 화가를 묘사합니다.
런던의 부유한 주식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가 주인공인데 그는 좋은 직장과 완벽한 가정을 내팽개치고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의 세계로 빠져들어 굴곡많은 생을 살다가 남태평양의 타히티에서 유작들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그가 그려낸 화가가 바로 후기인상파의 대가인 폴 고갱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구요.
박 수근과 폴 고갱의 어중간한 중간쯤에 르 마요르가 있습니다.
저는 벨기에라는 나라를 잘 모릅니다.
"프랄린"과 "길리안"이란 명품 쵸콜릿을 만들고, 애가사 크리스티의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땅딸보 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벨기에 인으로 묘사되고, 얼마전 보온병 파동을 일으킨 한나라당 대표 안 모씨를 풍자한 사진에 작품이 자주 등장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 나라 출신임을 알 정도인데, 르 마요르 또한 그 나라 사람이랍니다.
폴 고갱과 비슷한 시대의 사람인데, 그 동시대성에 그의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 타히티로 간 폴 고갱이 유럽사회의 관심을 끌자, 인도네시아를 침탈한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는 그무렵 벨기에의
촉망받는 청년 화가인 르 마요르를 회유하여 발리에 정착케 한 것이지요.
발리댄서와 결혼한 유럽의 화가에 대한 지원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강점과 수탈에 대한 이미지변신을 꾀한 것입니다.
두 화가 모두 "그 섬에 가고싶다."였지만 차이점은 매우 큽니다.
고갱의 타이티 행은 오랜 기간 준비한 자발적인 결정이었음에 반해 르 마요르의 발리 행은 어수룩한 한 화가를 부추긴
동인도회사의 음험함이 내재되어 있던 것이지요.
그런만큼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차이는 더욱 큽니다.
고갱은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대가이지만 르 마요르는 자신의 조국 벨기에에서조차 잊혀진 화가가 되었습니다.
- 이 키작은 미술관은 언제라도 그가 못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비록 여기저기 부실한 관리로 때론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지만 모든 것에 그의 손때가 묻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비오는 날의 미술관 구경은 이것저것 상념에 젖기엔 딱이더군요.
아무도 없는 빈 방과 정원을 거닐고, 바다가 보이는 뜨락의 담벼락에 서면 저의 경험이 아님에도 그가 했음직한 생각과
누렸던 삶을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길지않은 시간을 머물다 나서면서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입니다.
" I'll always remember you. " 외롭게 잊혀진 노화가에 대한 저의 작은 예우입니다.
- 감히 발리에서 가장 저렴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칼라스파." 어제 신두비치를 올라오면서도 똑같은 간판을 봤는데
르마요르에서 파라다이스 호텔로 가는 길 쁘라마 버스 정거장 옆에도 새로 생겼다. 필시 체인점이 분명할 터...
우산을 쓰긴 했지만 해변을 걷느라 흙탕물도 튀기고 해서 잠시 쉴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 "칼라스파' 입니다.
지난 6월, 쁘라마 버스를 타기 위해 이 근방을 얼쩡거렸을 때는 못 봤으니 새로 생긴 곳인 것 같습니다.
밖에 큼지막하게 내걸린 가격표에는 워낙 싼 가격을 제시했는데, 안은 의외로 깔끔합니다.(체인이라서 그런가...)
호기심이 발동해 들어가긴 했지만 1시간 전신 맛사지가 4만5천Rp이니 제가 보고 다닌 거리의 가격 중에서는 가장
저렴한 편이었습니다.
잠시 눈이라도 붙여볼까 했는데 싹싹하게 생긴 젊은 녀석이 거의 10분 간격으로 "아프진 않냐 ?"고 물어오는 통에 그냥
눈만 감고 있다가 나왔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지만 이 정도라면 비지떡도 나름 먹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마사지샵입니다.
저같으면 다시 이 거리를 지나더라도 찾을 만하다는 말이지요. (사실 시설빼면 실력의 차이는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라...)
돌아와보니 마누라는 서둘러 짐을 꾸리고 있습니다.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는 비행편이 새벽 6시라 그리 서둘 것도 없는데 일찌감치 짐을 싸놓고 쉬겠다는 심산이지요.
대충 짐을 꾸리고 책이며 사진들도 정리를 한 뒤,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나섭니다.
- 사누르에서 묵었던 이들에겐 아주 익숙한 저 길에도 오래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마시모"를 다시 찾았습니다.
지난 번 방문때, 낮에 왔다고 못 먹은 화덕피자를 기어코 먹어보기 위함이지요.
아직 저녁시간으론 이른 탓인지 손님들은 드문드문 보이는데 제게는 분주함보다 이런 한가로움이 더 좋습니다.
유명세를 타고 바글거리는 식당에서 손님 대우는 고사하고 눈치를 보며 시간에 쫓겨 식사를 하거나, 대기표 순번을
받아들고 감지덕지 밥을 먹어야하는 소위 소문난 식당이라는 곳은 딱 질색인지라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제 생각처럼 주문해 가져온 마시모의 피자들은 역시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정원이 녀석의 말마따나 우리 나라의 피자들이 토핑으로 현혹하려 든다면 여기의 피자는 화덕에서 갓 구워낸 바삭하고
담백한 도우로 승부합니다.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모처럼 피자다운 피자를 먹었다는 생각은 다들 똑같네요.
- 변함없는 마시모의 안과 밖 정경.
- 입구를 들어서면 좌측에 무성한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화덕이 나오고,
- 도로와 면한 우측으론 다양한 젤라또의 쇼윈도가 유혹을 한다.
- 주문한 피자를 내오기 전에 가져온 감자볼과 스틱. 짭쪼름한 맛이 영낙없는 빈땅의 친구이다.
이걸 안주삼아 먹다보니 그만 사진찍는 걸 잊어버려 먹는 중에 다시 찍었다. 처음엔 수북했는데,그래도 제법 남았네...
- 이 피자들 역시 먹기에 바빠 시켜놓고도 정작 이름을 잊어버렸다. 아무튼 얇게 구워진 도우의 바삭한 질감은 가히 환상적 ...
- 그리고 어린이들의 그림들이 걸린 이 장소는 바로 남자 화장실이다. 마누라의 말에 의하면 여자 화장실에도 뭔가
특색있는 게 있다던데 ... 이런 , 듣고도 잊어버렸다.
처음엔 크기에 질겁을 했는데 셋이서 그 큰 피자 두 판을 거의 다 해치웠습니다.
조금 남은 몇 조각은 먹성좋은 정원이 녀석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직원을 불러 싸 달라고 먼저 부탁을 합니다.
지난 여름, 실컷 구경만 하고 먹어보지 못한 젤라또도 돈을 건네주니 냉큼 사오더군요.
이 또한 양이 꽤 많은 편인데 한 입 베어 먹어보니 우리 돈 2~3천원쯤 하는 아이스크림도 제법 먹을만 합니다.
나와서 길을 걸어봅니다.
그동안 비는 그쳐 있고 어둠은 깔렸지만 우리 가족에게 아주 익숙해져버린 이 길도 이제 당분간은 안녕입니다.
마누라는 아쉬운 마음에 연신 거리의 불켜진 쇼윈도를 기웃거리고 , 호되게 앓고 살아난 정원이 녀석도 평소
사진 찍히길 싫어했던 것과는 달리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해주네요.
그러고보면 발리에서의 마지막 아쉬움과 여유는 다들 한결같은가 봅니다.
몇 번을 와도 그 누구에게라도 말입니다.
-
호주에는 아이스크림가게는 죄다 젤라또를 팔아요. 한국에선 한동네에 두개씩 있는 B아이스크림 - 31가지 맛이 있다는 그곳 - 체인점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젤라또가 비싸긴 하지만 아이스크림 같지않은 쫄깃함(?)이 색달라서 맛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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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마시모 피자 피자 피자 ㅠ.ㅠ
배고파욧! -
비슷한 말씀, 더러 듣습니다.
아예 발리에 눌러앉지 그러냐고 ...
하지만 눌러앉기엔 우리 나라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은 요지부동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때때로 가슴 벅차거나 기대어 위로받고 싶을 때
만나는 것으로도 족하답니다.
지금의 발리처럼
언제라도 훌훌 찾아가
만날 수 있는 대상으로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
발리의 31가격은
정말 무섭습니다.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 -
야밤에 올린 사진이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
보내주신 이메일 잘 받아보았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멀지않은시간에 발리에 정착한 정원이아빠를 본듯한.....이맘은뭘까요?
발리를 너무사랑하고 발리를놓을수없어 끌어안아버린 모습을 괜히혼자상상해봤습니다....
스치고놓쳐버린 발리의 요모조모 모습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