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아빠
Lv.17
2011.07.19 20:42
추천:8 댓글:12 조회:3,133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5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타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 광규의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지난 밤의 꿈자리가 사나웠던지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낮에 실컷 잘 얻어먹고 숙소로 걸어오다가 목격한 교통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작년이후로 내내 속을 썩히는 오십견의
통증 탓인지, 그렇찮으면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바람에 미처 끄지 못한 에어컨의 냉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5시 반... 다시 잠을 청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대충 샤워를 하고 휑하니 마실을 다녀오면 딱 아침 먹을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거리에 나서니 선선한 아침바람에 실려 조금씩 조금씩 어둠과 빛이 자리바꿈을 하고 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유난히도 부지런한 건지, 아니면 저처럼 지난 밤의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일찌감치 문을 연 가게도
하나 둘씩 보이고 빗자루를 들고 골목을 쓸러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 골목 안쪽에서 대형 배낭을 둘러 맨 서양 친구 하나가 걸어 나오네요.
입구에는 조그맣게 게스트 하우스의 간판이 붙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정성스레 손질한 꽃들과 나무들이 주인의 마음씀씀이를 짐작케 하는 곳인데 조용한 아침을 깨우는 새들의 지저귐과
닭들의 합창은 발리의 여느 집처럼 요란합니다.
마침 일하는 사람 하나가 나오길래 가격을 물어봤더니 1박에 20만Rp라며 금방이라도 방을 보여줄 기세입니다.
건성으로 물어본 제 질문에 너무도 진지한 자세로 대답해 오는 지라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황급히 빠져 나왔습니다.
- 마당이 깊고 예쁜 게스트 하우스였는데 아쉽게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네요.
좀더 내려오니 사누르비치 호텔의 입구입니다.
엇저녁 스모에 혼자 저녁을 먹으러 올 때만해도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하던 이 거리가 지금은 늦잠중입니다.
날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저마다 특색있는 조명을 밝히던 식당들도 밝은 햇살 아래서는 모두 간판만 다른
평범한 밥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맨 얼굴도 마치 화장빨로 가려졌다 드러난 술집여인의 퉁퉁 부은 얼굴이 아니라 해말간 시골처녀의 순박한
얼굴처럼 여겨집니다.
가리워진 치부나 은폐된 모습이 해아래 드러난 게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던 개성과 차이가 밝아오는 아침햇살 아래에서
별 의미가 없어진 까닭입니다.
- 스모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의 "트로피 펍" 도
- 올드 팝을 연주하는 "캣&피들" 도
- 날마다 라이브 연주와 왁자지껄한 춤판이 벌어지는 "마고" 도
- 환상적인 조명의 뿌리 산뜨리안 라운지와
- 그에 뒤지지 않는 "카무엘라" 까지 새로운 날의 아침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식당 거리가 끝나는 즈음에 자리잡은 작은 아트 샵 하나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습니다.
정원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가난한 화가인 제 아버지를 도와 가게 문을 열고 있는데 무척 수줍어 하네요.
햇살은 그 옹색한 화방 안에도 골고루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맞은 편의 제법 규모가 큰 갤러리에는 화가 하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작품 구상에 여념이 없습니다.
해서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는데 인기척을 알아차린 이 양반이 줄곧 저를 따라 다니더군요.
아마 방해가 안 되도록 조심하려했던 건 제 생각이었고 이 화가는 아침 마수걸이 손님쯤으로 생각했는지 설명에
여념이 없었습니다.(가격만 맞았으면 한 점 사들고 오려 했는데...)
구경에 너무 몰두한 덕에 이른 아침을 먹은 게 아니라 아침을 건너 뛰게 되었습니다.
늦게 돌아와선 밥을 차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로 했지요.
가져온 먹거리들 중에서 비빔냉면을 해 먹기로 하고 주방에서 삶는 것 까지는 잘 했는데 이런 아무리 찾아봐도
거르는 체는 보이질 않습니다. 물론 있을 턱이 없겠지만 혹시나 찾아보았지요.
할 수 없이 인내를 가지고 손과 젓가락을 사용해 조심조심 건더기와 물을 분리했지만 그동안 면발이 불어 비빔냉면이
굵은 비빔국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불어버린 양은 곱배기를 넘어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그릇에 넣어도 남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보면 한 일주일 가량을 사누르에만 들어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을러서는 결코 아니지만, 숨가쁘게 사방으로 쫓아다니며 보는 것보단 이젠 느긋하게 쉬면서 마음이 동해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이 탓도 결코 무시할 바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내일부터는 조금씩 행동의 반경을 넓혀 나가기로 한 터라 쁘라마 투어에 전화를 넣어 픽업을 요청했습니다.
행선지별로 정해진 시각에 사누르 정류장까지만 나가면 가고싶은 곳 아무데나 표를 끊어 갈 수 있지만 픽업비용이
1만Rp라고 되어 있어 전화를 넣어봤지요.
그 정도면 정류장까지의 택시비보다 훨씬 싼 편이니 밑져야 본전이다 싶었던 겁니다.
전화를 받는 직원이 숙소와 제 전화번호를 받아적고 나서 되물을 정도로 꼼꼼하게 확인까지 마쳤습니다.
해질 무렵 우연찮게도 장기체류 손님과 함께 마실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작은 숙소인지라 아침마다 식당에서 눈인사를 주고받고 또 자전거를 구하러 다니면서 조금씩 안면을 텄지만 연배가
훨씬 위처럼 보여 쉽게 가까와지기는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간혹 뜨락에 나와 앉아 책을 읽다보면 대각선으로 마주 보이는 본채건물 2층 테라스에서 역시 책을 읽고 계시더군요.
그래서인지 오늘은 뜬금없이 사장님 왈 "두 분이 성향이 비슷한 것 같은데 같이 나갔다 오세요."라며 차에 태워
사누르 비치의 어느 한 모퉁이에 내려줍니다.
전해 듣기로는 정년퇴직 후 무언가를 모색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 저와는 입장 차이가 있고 관점도 틀릴 것 같아 깊숙한
속얘기는 서로 피했었는데 석양이 지는 해변가에 앉으니 그 견고한 "나눔의 벽" 이 차츰 낮아지더군요.
알고보니 살아온 인생의 궤적도 비슷한 분이었습니다.
어렵던 시절, 힘들게 대학을 마치고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나 쥐꼬리같은 월급때문에 민간기업으로
옮겨 온 것이나 말입니다.
하지만 70년대의 학번을 가졌으니 82학번인 저보다는 한참이나 형님뻘인 분입니다.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살아갈 날들을 위해 번민하고, 또 그러는 가운데 가족을 위한 책임감도 온 몸으로 부여안은 ...
앞서 살아온 이의 모습이지만 어쩌면 앞으로 제가 살아갈 모습과 과히 틀리지 않는 모습일 겁니다.
낭만도 열정도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해가고 세월은 흘러갑니다.
다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에서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고싶을 따름입니다.
-
후기 잘 보고 있습니다. 허니문의 후기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허니문 후기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수가 있네요..저도 필리핀에서 4개월 조금 더 있었는데 더 많은 것을 얻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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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계신다니 고맙네요.
-
비록 윤회론자가 아닐지언정 나는 이 한달의 어느 어귀쯤에서,
지금 한달의 삶이 본리그를 앞두고서 행하는 일종의 전지훈련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 훈련의 어느 어귀쯤에서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이상으로 몰려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펜클럽 중에서..
요즘 젊은놈인 저는 이책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살고 있습니다.
(몇년후면 중년이 되겠지만요 ..)
그러면서도 이 책대로는 살지못하고 정원이 아빠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요..(그래도 발리에서만큼은 이책대로 살고옵니다)
정말 많은 공감이가고.. 한번쯤 뒤돌아보게끔 만드는 후기.. 잘읽었습니다.
오늘밤 술맛은 좋은 글안주가 있어서 무척이나 달게 느껴집니다. -
정원이아빠님의 후기 열공자가 되었어요. 사누르의 구석 구석 잘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후기도 잘 부탁드립니다. -
오늘도 발리에서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바쁘게 일하고 있네요..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읽어보고 있습니다. ^^
여행 좋아하시는 분들은 모두 같은 마음을
가슴에 지니며 현실을 살고 있다라는 느낌..
젊었을 때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해 뒤돌아 볼수 있는 여유가
좀 더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 을 읽어보셨나요 ?
짧은 내용에 쉽게 쓰여졌지만 울림은 묵직합니다.
오래 전에 보셨다면 다시 읽어도 그 맛이 새로울 겁니다.
그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자신의 믿는 바대로 살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더라는 평범한 진리...
저도 신앙처럼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그것도 아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단서는 붙지만 .... -
제 글이 작은 대리만족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저도 그만큼 기쁘네요. -
훗날 그런 마음을 지니고 발리를 다시 가면
또다른 발리의 모습을 아주 쉽게 만날 겁니다.
사실 섬은 언제나 그대로인데
우리가 늘상 딴 마음을 먹고 바쁘게 급하게 다녀오는 것이니까요.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못 느끼던 것도 느껴보는 것..
그게 진짜 여행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일테지요.
저도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입니다. -
잔잔한 글 읽고 있으면 정원이 아빠님과 동화되는듯 하군요 ^^ 덕분에 발리에서 제가 모르는 부분들을 간접체험 할수 있어 좋은듯 합니다.
82학번이시면 저보다 한 10년정도 선배이신데 다음에 발리에 오신다면 한번 뵙고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나누고 싶군요 ^^ -
저도 꼭 뵙고 싶습니다.
-
이메일로 두번이나 도움을 받은 이**입니다...기억하실런지요...
후기 잘 보고 있습니다...
연배가 저보다 조금 더 있으실거란 느낌이었는데...
역쉬나~~~ ^^*
10일후면 몸과 마음이 발리에 있을수 있겠네요...그때까지 후기 잘 읽고 가겠습니다. -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