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brave
Lv.5
2011.09.09 13:28
댓글:4 조회:1,620
밤새 안녕?
할려고 갑판을 보니 아무도 없다. 어제도 배는 위아래로 바이킹을 하면서 2층 앞쪽 데크는 물바다가 됬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4박5일팀은 라부한바조에서 탄 2박3일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물폭탄을 맞아봐야 진정한 보트투어를 만끽한 것이라는 당치도 않은 이유를 대며. 어쨋든 5일간 배를 같이 타다보니 처음에는 서로 힐끔거리다 이제는 그럭저럭 같은 동지애(?)를 느낀다. 순탄한 크루즈 여행도 아니고 나름 고생스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텝들도 눈에 익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일출은 멋지게 나오다가 구름에 가렸다. 이후에는 아침부터 땡볕이 되었다. 고추 말리기 좋은 날씨로 이 번 일정 중 하루도 비가 오지 않았다. 뒷쪽 갑판은 아직도 비몽사몽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모요섬에 도착하니 동네 사람들이 구경 나온다. 마을을 중심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는데 참 아름다운 동네였다. 길 양쪽으로 낡았지만 깔끔한 집들 그리고 논 풍경이 펼쳐지고 드문 드문 염소와 소들이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벗어나자 냇가를 끼고 계속 길은 이어졌다. 울창한 나무 덕분에 그리 덥지는 않았다. 모두들 코모도섬의 강열한 햇빛을 견디고 난 뒤라 이정도는 트래킹도 아닌 가벼운 아침산책이었다. 개천을 두 번 건너 20분쯤 올라가자 폭포가 나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올려다 보는 폭포가 아닌 커다란 바위 밑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깊이는 꽤 되서 로프를 타고 뛰어 내려도 좋을 정도였다.
[위/ 잘 잡은 손자세, 아래/ 저러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로프에 꼬이면 손가락이 비틀리면서..T.T]
현지 젊은이 하나가 보란듯이 시범을 보였다. 그러자 용기를 낸 젊은 웨스턴들이 가세했는데 여자들도 풍덩거리며 잘도 뛰어내린다. 사실 난 촬영장비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냥 시간이나 때우다 내려갈려고 했었는데...
카메라와 허리색을 미녀삼총사에게 맡기고 남들처럼 로프를 잡고 뛰어내렸다. 물 속에서 올라와 손가락이 이상해서 손을 들어보니 약지 두번째 마디가 30도쯤 돌아가 있었다. 충격을 먹었지만 우선 물에서 나와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많았지만 쏘렌과 스위스 부인이 다가와서 괜찮냐고 묻는다. 난 괜찮다고 하면서 숲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건드려보니 통증이 상당하다. 골절이 됐든 아니든 손가락은 바로 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약지를 움켜쥐면서 돌렸더니 돌아가더라. T.T 무지 아팠다. 이날까지 별로 다쳐보거나 병에 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지 무지 아팠다.
스위스 부인이 자신의 배낭에서 구급낭을 빼더니 응급조치를 해준다. 나의 구급낭은 배안에 있다. 하필 오늘만 놓고 온 것이다. 상태로 볼 때 심한 골절은 아닌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종교가 없음에도 신께 감사드렸다. 붕대를 감고나자 지켜보던 가이드인 나르딘을 비롯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인다. 괜찮다는 제스처와 오케이를 연발하며 난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사실 챙피한 것도 있고 좋은 분위기를 깨기 싫었다. 카메라 때문에 친해진 쏘렌(덴마크 대학생)은 정말 괜찮으면 한 번 더 뛰란다. 스위스 부인이 뭐라 한다.
어찌됐건 그 뒤로 귀국할 때까지 나는 졸지에 원숭이가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걱정어린 덕담(?)을 들어야했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사랑과 관심은 약한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걱정이 된 스위스 부인은 폭포에서 내려 올때도 옆에서 말을 걸어주며 동행을 해 주더니 잠시 후 닉과 그 부인이 관심을 보인다. 괜찮고, 한국남자들은 군대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견딘다. 하다가 내 의경생활 얘기를 하자 닉이 반색을 하며 다가온다. 자신은 캘리포니아 경찰이었다면서 87년 전후의 긴박했던 민주화 시위에 관심을 보인다. 뭐 그 다음부터는 어느새 나와 닉만 있었고 닉의 부인과 스위스 부인은 저만치 앞서가면서 얘기를 나눴다.
배까지 오는동안 닉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내 입장에선 멘토를 만난 기분이었다. 70 가까운 노인이 부인과 함께 세계를 누비는 그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손가락을 다쳤지만 인생항로를 얻었으니 아프지 않았다. 신께 경배 드리고 싶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마지막 스노클링과 수영을 위해 께라맛(Keramat)섬을 향해 항해했다. 께라맛섬은 정말 작아서 사람이 살기에는 어렵고 작은 덤불숲과 산호해변만이 있을 뿐이었다. 상륙을 원하는 사람만 작은 배를 타고 나머지는 스노클만 착용하고 바로 배에서 섬까지 바다 속을 보며 갔다.
스쿠버를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다. 저 밑에 보이는 웅장한 산호세계를 보고 싶다.
떠나기 전 2층 갑판에서 바로 뛰어내릴 수 있었는데 바라만 봐야 하는 입장이라 답답했다. 212호의 잘 빠진 검은진주들이 뛰어 내릴 때는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니 남자들만 그랬나?
이것으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배는 다시 롬복을 향해 간다.
석양이 질 무렵 린자니산을 볼 수 있었는데 3,726미터답게 항상 구름에 그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구름에 걸려 위로 나온 린자니산을 보면서 신들이 사는곳이라고 생각한 고대인들의 생각에 수긍이 간다는 불한당님의 말씀에 동감한다.
배는 어둠이 깔린 라부한 롬복항을 향해 미끄러지듯 정박하고 간단한 미팅을 하고 무사귀환을 자축한다. 곧이어 212호가 도착하자 하선해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나눠탄다. 승기기 쪽은 대형버스에 마따람쪽은 소형버스에 나눠타고 가로등이 없어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달려간다. 창밖으로 가끔씩 보이는 마을의 밤풍경을 보며 인니인들의 일면을 조금이나마 보고자 감기는 눈을 치켜 뜬다.
쁘라마 마따람 오피스에 내려 내일 발리로 가는 교통편을 예약하는데 무척이나 친절하다. 내 손을 보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남편인듯한 남자를 깨워와서 호텔까지 실어다 줬다. 그것도 무료로. 고마워서 약간의 팁을 드렸더니 거친수염이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난다. 그의 웃는 모습이 어릴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우리도 6-70년대를 그렇게 살았다. 생존을 위해 살지만 작은 인정과 호의가 그나마 험하다고 하는 인니여행에서 지친 여행자를 웃음짓게 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나마 손가락을 다시 비틀어 펴길 정말 잘했다는...// 롬복 병원에서 우리나라 의료기기를보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요기를 할려고 나갔더니 병원이 보이길래 엑스레이 촬영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마따람에서 가장 크다는 이 병원은 매우 친절하다. 사진을 찍고 잠시 후 직원이 필름을 보더니 금이 갔단다. 정말 다행이었다 완전 골절이 아니어서...처치를 받고 계산을 하니 50만루피아가 조금 못됐다. 외국인요금이라 그럴 것이라며 나중에 발리에서 만난 웨스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병원에 가서 돈을 내 본적이 없어 그게 싼지 비싼지를 모르겠단다. 어디나라 사람인지 물어보니 쏘렌과 같은 덴마크 사람이었다. 지들은 병원가서 돈을 내지 않는댄다. (아놔~~너네는 복지 때문에 망할거라고 우리 지도층은 말씀하신단다. 지금 우리의 복지도 과하다고~~당연하지 우린 그들만큼 부자들이 세금을 안내잖아T.T)
이렇게 내 생애 첫 보트투어 마지막 날이자 롬복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Thanks for everything!
# 고지
이 글은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지극히 주관적이고 부실한 글입니다. 이글에 있는 여행정보는 언제든 변동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따라한 그 책임은 행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사진은 무단 전제하지 말아주세요. 신변잡기적인 글이라 경어체를 쓰지 않았습니다.
할려고 갑판을 보니 아무도 없다. 어제도 배는 위아래로 바이킹을 하면서 2층 앞쪽 데크는 물바다가 됬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4박5일팀은 라부한바조에서 탄 2박3일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물폭탄을 맞아봐야 진정한 보트투어를 만끽한 것이라는 당치도 않은 이유를 대며. 어쨋든 5일간 배를 같이 타다보니 처음에는 서로 힐끔거리다 이제는 그럭저럭 같은 동지애(?)를 느낀다. 순탄한 크루즈 여행도 아니고 나름 고생스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텝들도 눈에 익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일출은 멋지게 나오다가 구름에 가렸다. 이후에는 아침부터 땡볕이 되었다. 고추 말리기 좋은 날씨로 이 번 일정 중 하루도 비가 오지 않았다. 뒷쪽 갑판은 아직도 비몽사몽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모요섬에 도착하니 동네 사람들이 구경 나온다. 마을을 중심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는데 참 아름다운 동네였다. 길 양쪽으로 낡았지만 깔끔한 집들 그리고 논 풍경이 펼쳐지고 드문 드문 염소와 소들이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벗어나자 냇가를 끼고 계속 길은 이어졌다. 울창한 나무 덕분에 그리 덥지는 않았다. 모두들 코모도섬의 강열한 햇빛을 견디고 난 뒤라 이정도는 트래킹도 아닌 가벼운 아침산책이었다. 개천을 두 번 건너 20분쯤 올라가자 폭포가 나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올려다 보는 폭포가 아닌 커다란 바위 밑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깊이는 꽤 되서 로프를 타고 뛰어 내려도 좋을 정도였다.
[위/ 잘 잡은 손자세, 아래/ 저러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로프에 꼬이면 손가락이 비틀리면서..T.T]
현지 젊은이 하나가 보란듯이 시범을 보였다. 그러자 용기를 낸 젊은 웨스턴들이 가세했는데 여자들도 풍덩거리며 잘도 뛰어내린다. 사실 난 촬영장비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냥 시간이나 때우다 내려갈려고 했었는데...
카메라와 허리색을 미녀삼총사에게 맡기고 남들처럼 로프를 잡고 뛰어내렸다. 물 속에서 올라와 손가락이 이상해서 손을 들어보니 약지 두번째 마디가 30도쯤 돌아가 있었다. 충격을 먹었지만 우선 물에서 나와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많았지만 쏘렌과 스위스 부인이 다가와서 괜찮냐고 묻는다. 난 괜찮다고 하면서 숲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건드려보니 통증이 상당하다. 골절이 됐든 아니든 손가락은 바로 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약지를 움켜쥐면서 돌렸더니 돌아가더라. T.T 무지 아팠다. 이날까지 별로 다쳐보거나 병에 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지 무지 아팠다.
스위스 부인이 자신의 배낭에서 구급낭을 빼더니 응급조치를 해준다. 나의 구급낭은 배안에 있다. 하필 오늘만 놓고 온 것이다. 상태로 볼 때 심한 골절은 아닌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종교가 없음에도 신께 감사드렸다. 붕대를 감고나자 지켜보던 가이드인 나르딘을 비롯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인다. 괜찮다는 제스처와 오케이를 연발하며 난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사실 챙피한 것도 있고 좋은 분위기를 깨기 싫었다. 카메라 때문에 친해진 쏘렌(덴마크 대학생)은 정말 괜찮으면 한 번 더 뛰란다. 스위스 부인이 뭐라 한다.
어찌됐건 그 뒤로 귀국할 때까지 나는 졸지에 원숭이가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걱정어린 덕담(?)을 들어야했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사랑과 관심은 약한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걱정이 된 스위스 부인은 폭포에서 내려 올때도 옆에서 말을 걸어주며 동행을 해 주더니 잠시 후 닉과 그 부인이 관심을 보인다. 괜찮고, 한국남자들은 군대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견딘다. 하다가 내 의경생활 얘기를 하자 닉이 반색을 하며 다가온다. 자신은 캘리포니아 경찰이었다면서 87년 전후의 긴박했던 민주화 시위에 관심을 보인다. 뭐 그 다음부터는 어느새 나와 닉만 있었고 닉의 부인과 스위스 부인은 저만치 앞서가면서 얘기를 나눴다.
배까지 오는동안 닉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내 입장에선 멘토를 만난 기분이었다. 70 가까운 노인이 부인과 함께 세계를 누비는 그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손가락을 다쳤지만 인생항로를 얻었으니 아프지 않았다. 신께 경배 드리고 싶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마지막 스노클링과 수영을 위해 께라맛(Keramat)섬을 향해 항해했다. 께라맛섬은 정말 작아서 사람이 살기에는 어렵고 작은 덤불숲과 산호해변만이 있을 뿐이었다. 상륙을 원하는 사람만 작은 배를 타고 나머지는 스노클만 착용하고 바로 배에서 섬까지 바다 속을 보며 갔다.
스쿠버를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다. 저 밑에 보이는 웅장한 산호세계를 보고 싶다.
떠나기 전 2층 갑판에서 바로 뛰어내릴 수 있었는데 바라만 봐야 하는 입장이라 답답했다. 212호의 잘 빠진 검은진주들이 뛰어 내릴 때는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니 남자들만 그랬나?
이것으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배는 다시 롬복을 향해 간다.
석양이 질 무렵 린자니산을 볼 수 있었는데 3,726미터답게 항상 구름에 그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구름에 걸려 위로 나온 린자니산을 보면서 신들이 사는곳이라고 생각한 고대인들의 생각에 수긍이 간다는 불한당님의 말씀에 동감한다.
배는 어둠이 깔린 라부한 롬복항을 향해 미끄러지듯 정박하고 간단한 미팅을 하고 무사귀환을 자축한다. 곧이어 212호가 도착하자 하선해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나눠탄다. 승기기 쪽은 대형버스에 마따람쪽은 소형버스에 나눠타고 가로등이 없어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달려간다. 창밖으로 가끔씩 보이는 마을의 밤풍경을 보며 인니인들의 일면을 조금이나마 보고자 감기는 눈을 치켜 뜬다.
쁘라마 마따람 오피스에 내려 내일 발리로 가는 교통편을 예약하는데 무척이나 친절하다. 내 손을 보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남편인듯한 남자를 깨워와서 호텔까지 실어다 줬다. 그것도 무료로. 고마워서 약간의 팁을 드렸더니 거친수염이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난다. 그의 웃는 모습이 어릴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우리도 6-70년대를 그렇게 살았다. 생존을 위해 살지만 작은 인정과 호의가 그나마 험하다고 하는 인니여행에서 지친 여행자를 웃음짓게 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나마 손가락을 다시 비틀어 펴길 정말 잘했다는...// 롬복 병원에서 우리나라 의료기기를보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요기를 할려고 나갔더니 병원이 보이길래 엑스레이 촬영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마따람에서 가장 크다는 이 병원은 매우 친절하다. 사진을 찍고 잠시 후 직원이 필름을 보더니 금이 갔단다. 정말 다행이었다 완전 골절이 아니어서...처치를 받고 계산을 하니 50만루피아가 조금 못됐다. 외국인요금이라 그럴 것이라며 나중에 발리에서 만난 웨스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병원에 가서 돈을 내 본적이 없어 그게 싼지 비싼지를 모르겠단다. 어디나라 사람인지 물어보니 쏘렌과 같은 덴마크 사람이었다. 지들은 병원가서 돈을 내지 않는댄다. (아놔~~너네는 복지 때문에 망할거라고 우리 지도층은 말씀하신단다. 지금 우리의 복지도 과하다고~~당연하지 우린 그들만큼 부자들이 세금을 안내잖아T.T)
이렇게 내 생애 첫 보트투어 마지막 날이자 롬복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Thanks for everything!
# 고지
이 글은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지극히 주관적이고 부실한 글입니다. 이글에 있는 여행정보는 언제든 변동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따라한 그 책임은 행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사진은 무단 전제하지 말아주세요. 신변잡기적인 글이라 경어체를 쓰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