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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기
2011.07.29 20:15 추천:8 댓글:3 조회:2,846
balisurf.net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첫눈이 오는구나
  은유법도 문장성분도 잠시 덮어두고
  저 넉넉한 평등의 나라로 가자
  오늘은 첫눈 오는 날
  산과 마을과 바다 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백색의 화해와 평등이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매운 손찌검을
  너희들 가슴에 칼금을 그은 편애를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구나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순결의 첫눈을 함께 맞으며
  한 칠판 가득 적어놓은
  법칙과 법칙으로 이어지는
  죽은 모국어의 흰 뼈를 지우며
  우리들 사이의 먼 거리를 하얗게 지우자
  흰 눈발 위로 싱싱히 살아오는 모국어로
  나는 너희들의 이름을 
  너희들은 나의 이름을
  사랑과 용서로 힘차게 불러 껴안으며
  한몸이 되자
  한몸이 되어 달려나가자                                                                 정 일근의 " 바다가 보이는 교실 9 "


  내리 사흘 동안의 바깥 나들이를 멈추고 오늘은 철저히 쉼표에 의미를 두기로 했습니다.
  고물버스를 타고 짠디다사와 우붓을 누비고  비록 와얀을 앞세웠어도 서쪽으로의 북상길은 그리 만만치 않았나 봅니다.
  빡빡하지 않은 스케쥴이라 몸이 녹초가 되거나  마음이 가라앉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 숨을 고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원래는 오늘쯤해서 길리행을 염두에 두었지만  그 또한 내일로 미루었습니다.
  몇 년전만 같아도 한 번 여행길에 나서면 "중단없는 전진" 의 모드였지만 이제는 과히 서두름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나이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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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같이 일어나  외장하드에 쑤셔넣은 사진들을  말끔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붓 어린이들의 사진이며 거리에서, 갤러리에서 찍은 그림들이 순서없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게 마치 제 흉한 몰골처럼
  느껴져 지울 건 지우고 옮길 건 옮겨놓으니 그제서야 좀 말끔해졌습니다.
  그러고도 밥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습니다.
  과히 멀지않은 곳에 살고계신 선배 한 분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지요.
  늘 올 때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성의없는 전화나 한 통 넣는 게 고작인지라 사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터였습니다.
  저는 여행길이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분이라서 이른 아침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을 듯 싶어서였는데
  다행히 집에 계시더군요.
  식전 댓바람부터 나타난 저를 보고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아침을 함께 먹자는데 그마저도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사양하고 모닝커피만 함께 나누었습니다.
  생각보단 건강한 모습이라 반가왔지만  여기나 거기나 사람사는 세상의 희노애락은 매 한가지인지라  줄곧 마음 편히 
  지내는 건 아닌 듯 싶어 보입니다.
  긴 말은 나누지 못했지만 그냥 얼굴을 보여드린 것만으로도 제 속은 한결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돌아와선 오전 내내 위의 브로셔들을 펼쳐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길리섬으로 가는 교통수단으론 비행기보단 쾌속선이 훨씬 낫다는(비용,소요시간,이동의 단순성 등등) 건 이미 결론을
  내렸지만 한 장 두 장씩 모은 쾌속선의 브로셔들이 대동소이하다는 게 고민입니다.
  저마다 나름 특색을 지녔지만(승선시 아침 도시락을 제공하는 곳도 있습니다.) 큰 차이가 보이질 않습니다.
  이럴 땐 아무래도 사소한 욕심을 접어두고 관점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겠지요.
  숙소에서의 픽업과 드럽오프를 제대로 해주느냐와 비용으로 압축되는데 결국 출발과 도착지의 선택이 다양하고 할인의
  혜택도 제일 큰 " 마리나 수라칸디 "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빠당바이 항구의 요기에게 전화를 하니 저를 기억하고 있었던지 몹시도 반가와하네요.
  모든 조건을 다시 듣고 재차 확인까지 한 뒤 예약을 마쳤습니다.
  사흘 전 제게 말한 그대로로 말입니다.



  숙소에서의 방콕생활을 즐기던 지난 주라면 홀로 먹는 저녁식사는 위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간간이 나가서도 먹고 왔지만  샹쿠의 나시고랭과 아얌에 중독된 저인지라 혼자 하는 식사도 맛만 좋더군요.
  하지만 숙소와 이어진 식당 뒷문으로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도 좀 뭣해 보여 아예 시켜 먹기로 한 것이지요.
  게다가 가져온 주류들을 빠른 속도로 처분하려면 저렇게 음식을 들여다놓고 마음편히 자작 하는 게 최고였습니다.
  게다가  마음씨 고운 샹쿠의 스텝들은 제가 불쌍한 표정으로 "사야 라빠르 스깔리 "를 처량하게 되뇌이면 큼지막한
  중국식 빵 다섯 개가  든 접시 하나를 서비스로 넣어주기도 할 정도이니까  아예 단골인 셈이지요.

  오늘도 모처럼 저런 나홀로의 만찬을 하려는데 2층의 장기체류 손님이 저를 보잡니다.
  본관 2층 발코니로 올라가보니 이 분 왈 "오늘은 제가 살테니 나가서 먹읍시다. " 라고 말씀하시네요.
  이를테면 어제 저와 동행해 모처럼 좋은 구경을 헀다는 답례인데 저역시 큰 부담은 없는지라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함께 나섰습니다.
  오랫만에 스테이크류의 고기가 먹고싶다길래 멀지않은 "아레나" 로 모시고 갔습니다.








  뜻밖에도 장기체류 손님은 외국생활을 오래 한  때문인지 서양 육식류를 아주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각 국의 국기를 보고 선택을 하게끔 차별화된 차림표에서 스테이크와 곁들여 먹을 몇 가지 샐러드를 추가하고
  드레싱까지 제가 알아서 골랐는데도 만족해 하시네요.
  그러더니 식사가 끝난 후 조심스레 제게 휴대폰을 건네줍니다.
 "여기 배경사진에 있는 내 보물단지 보실래요 ? "
  저는 잠자코 들여다 보았습니다.
  꽃밭을 배경으로 담은 그 안에는 꽃보다 더 예쁜 작은 "공주님"이 활짝 웃고 있네요.
 " 제 손녀 딸입니다. 케이 리라고 하지요."
  겸연쩍게 말씀하시는 케이 리 할아버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배어 나옵니다.
  사진 속 손녀딸의 웃음과 똑같은 붕어빵으로 말입니다.
  
  • protect24 2011.07.30 07:23 추천
    여행은 자신의 심신을 추스리는것이지요..정원이아빠님의 글을보고 있으면 예전 필리핀에 있을때가 생각나 아이들이 보고 싶네요.
  • thinkbali 2011.08.08 13:47 추천
    우와! 털보 할아버지 손녀딸 이름이 캐리 리 였네요.
    안녕하세요.
    개으름의 여왕 쥔장입니다.
    잘계시죠?
    어제 털보 할아버지 들어 오신다는 맬 받고,
    생각나서 급하게 열어 보니 역시 멋진 글들이....
    늘 건강하시고, 사모님께도 안부 좀 전해 주세요.
    내친김에 아레나에서 저녁 먹을라구요. 오늘! icon_thumright.gif
  • 정원이아빠 2011.08.08 17:18 추천
    아레나에서의 저녁식사...

    비 오는 서울에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