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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기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 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김 수영의  [오래된 여행가방]

balisurf.net
-우붓을 기억나게 하는 상징처럼 블랑코 미술관 아트샵 옆에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아름드리 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

09.08.31(월)
발리에 와서 오늘은 처음으로 분주하고 바쁜 아침을 맞이합니다.
우붓으로 가려고 일정을 잡은 탓인데 마치 좋아하는 연인이라도 만나러가는 양 살짝 설레임까지 들더군요.
(제가 바람이라도 난 걸까요? ㅎㅎㅎ)
하지만 이내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하는 기로에 봉착합니다.
쁘라마 버스를 타고 가보고자 운행스케쥴까지 지니고 왔는데 분도형님조차 쁘라마 버스는 타 본적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정류장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인데 순간 난감해졌습니다.
그냥 편하게 블루버드를 대절해서 휑하니 다녀올까 하다가 그래도 지금처럼 여유를 만끽하는 홀로행이 아니면 언제 다시
쁘라마를 탈까싶어 강행하기로 하고 택시를 불렀는데 다행히 기사는 정류장을 잘 아니 걱정말라더군요.
15분쯤 지나 내려준 곳은 바로 지난번에 묵었던 파라다이스 플라쟈 아래 해변으로 가는 도로변의 상점이었습니다.
지난 7월의 어느 날 아침 르 마요르 뮤지엄을 보고오면서 하도 더워 생수를 사러 들어갔던 허름한 점포...
그 때는 가게 앞에 늘어선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줄도 몰랐고 정류장인지 조차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역시 알고 있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위력을 새삼 확인한 셈이 된 것이지요.

balisurf.net
-사누르 쁘라마버스 정류장. 왼편 가게 안에서 편도티켓(4만루피)를 끊고 길가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린다.
 승객은 현지인 몇과 거의 백인 일색인데 이 곳에선 롬복이나 로비나 등의 장거리노선도 다양하게 있었다.-


-쁘라마 버스티켓. 위의 것은 우붓에 내려 미리 막차 리턴표를 끊은 것인데 푸리 루키산 미술관을 나오다 우연히 앤디를
 만나 차를 얻어타게 되어 캔슬도 못하고 결국 페기처분 되었다. -


-우붓의 쁘라마 정류장. 아르마미술관이 멀지않은 거리에 있다. 차에서 내리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렌트하라는 녀석들이
 떼로 몰려드는데 단 절대 처음부터 O.K 하지말 것. 첫번째 녀석과의 흥정보단 다음번 녀석의 가격이 훨씬 좋아진다.-


10시 15분에 차는 정확히 우붓을 향해 출발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라면 진작에 폐차장으로 갔을 법한 70년대풍의 운전석옆에 엔진룸이 불룩한 25인승 고물버스.
하지만 오르막에서 씩씩거리며 힘겨워 하는 걸 빼면 그런 대로 잘 달리는 편입니다.(워낙 속도가 느리니까)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조차 없는 차내도 작은 미닫이 창들을 모두 열어놓아 들이치는 바람이 제법 상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50분쯤을 달리자 우붓 초입의 익숙한 광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쁜 걸음으로 종종거리는 사람이나 쉴 새 없이 오가는 차들이 아닌 거의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슬로우화 되어 있는 이 곳,
드디어 우붓에 도착했습니다.
해서 처음엔 저도 자전거를 렌트하여 하루종일 어슬렁거릴까 하는 생각으로 4만루피를 부르는 녀석과 흥정을 하다가 
주차나 보관에 적지않이 신경이 쓰일 것 같아 거리에 지천인 오토바이 픽업을 수시로 이용하는 게 더 낫겠다 싶더군요.
마침 지나가는 한 녀석의 타겠냐는 제의에 2만루피로 흥정을 하고 블랑코로 향합니다.


- 안토니오 블랑코 미술관 입구. 저너머 위로 올라가는 도로가 네카뮤지엄과 뜨갈라랑으로 가는 길이다.-


- 블랑코미술관(정식명칭은 블랑코 르네상스 뮤지엄)으로 들어가는 정문. 
  진짜 르네상스시대로 들어서는 시간의 문처럼 느껴진다. -

 
- 언덕을 올라와 왼쪽 둥근 창처럼 낸 공간이 이곳 매표소이다. 입장료를 내면 방명록을 쓰고 카탈로그를 주면서 바구니의
  꽃을 귀에 꽃아준다. 가격엔 미술관 바로 앞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웰컴드링크가 포함되어 있다.-

몇 번의 우붓행에서 늘 이런저런 이유로 빼놓앗던 블랑코 미술관.(사실 누드그림이 많다는 이유로 정원이를 동반하기엔
교육상 부적합하다는 잘못된 편견이 가장 큰 이유였더랬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오자마자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인데 결론은 여기, 우붓의 숨어있는 보석과 같은 곳입니다.
당연히 아이의 동반도 교육상 오히려 더 필요한 공간이구요.(제 명예를 걸고 강추합니다.)
"발리의 달리"라 불리는 안토니오 블랑코는 이 곳 출신이 아닌 스페인계의 필리핀 마닐라 태생으로 뉴욕에서 미술공부를
마친 후 이곳 저곳을 떠돌다 1952년에 이 곳 발리에 정착합니다.
당시 발리의 영주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2에이커의 토지를 하사해 만든 곳이 바로 이 미술관인 셈이지요.
1911년생인데 아직 작고했다는 소리는 없지만 이젠 일선에서 물러나 지금은 발리태생인 그의 아들 마리오 블랑코가
주축이 되어 그의 가족들과 함께 미술관을 꾸려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대충의 연혁은 카탈로그의 요약입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헝그리 복서가 로또에 당첨된 셈인데 , 막대한 땅을 하사받은 가난한 젊은 화가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만 평생을 그렸으니 참 부러운 일이지요.
그래서인지 블랑코의 그림에는 여유와 밝음이 배어있습니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던 그 여유와 밝음은
르네상스풍의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미술관 안팎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 매표소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처음 만나는 작은 정원. 본관까지는 다시 왼쪽의 원형문을 통과해야 한다. -


- 위 사진의 맞은편에 눈에 잘 띄지않는 돌벤치가 있다. 미술관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는 이런 작은 배려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지다. -

  
- 본관으로 들어가기 전 오픈된 스튜디오에 걸린 사진 2점. 왼쪽이 현재 미술관을 운영하는 아들 마리오이고 오른쪽은
  미술관을 방문한 생전의 마이클 잭슨과  안토니오 블랑코의 모습.-


- 아들 마리오 블랑코의 작업실. 마치 방금전까지도 그림을 그린 듯 작가의 체취가 남아있는 모습이다. -


- 아버지 안토니오 블랑코의 작업실. 위 사진과 달리 역시 여기선 작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 본관 입구의 버드파크. 새들이 오픈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노닐다 밤에만 옆의 조롱 속으로 들어간단다. 아예 새를 사육
  하는 직원이 따로 있는데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친구가 미술관의 온갖 새를  내 팔뚝과 어깨에 올려놓고 카메라를
  찍어대는 돌발상황을 연출하여 무척 당황했다. 아이들 데려가면 거의 까무러칠 듯.-
  

- 본관 전면. 입구의 기묘한 형상은 바로 안토니오 블랑코의 그림에 들어가는 사인(우리 고서화의 낙관처럼)이란다. 와우...


-안토니오 블랑코는 매부리코의 형형한 눈빛을 가진 일견 고집스러운 인상의 소유자로 보였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격식과 화려한 테크닉의 회화만 그린 게 아니라 실험적인 코르타쥬, 잡지를 오려 붙여 만든 시계,그리고
 이런 어린이풍의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세계를 구사하고 있다.-


전체가 2층으로 된 미술관 안에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이 폐쇄회로 카메라만 저를 지켜 보고있습니다.
르 마요르의 편안함은 없지만 그림 하나하나에  섬세한 표현이 녹아 있는데 또다른 볼거리는 그림을 장식하는
액자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이 나름 독특한 장식의 액자인데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보니 작품아닌 작품이 되어 버립니다.
2층까지 올라가 좌에서 우로 그림을 모두 둘러보고 내려 가려다가 볕이 따뜻한 테라스가 보여 잠시 밖으로 나가봅니다.
헌데 2층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제법 가파른 철제 계단이 눈에 보이더군요.
거기도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와우, 이 미술관의 또다른 볼거리가 그 곳에도 숨어 있었습니다.
배경처럼 펼쳐진 숲도 숲이거니와 옥상 난간의 구석구석에 배치된 황금색의 발리니스와 여신상은 마치 살아있는 듯 합니다.


- 십년전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작은 어촌 피쉬맨스 와프의 거리에서 온 몸에 은색 페인팅을 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경탄하며 보았었는데 우붓의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발리니스의 동상에서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 작품과 배경이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모습 -


-이제는 설명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보시길...-

참으로 눈이 즐거워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윽고 본관건물을 빠져나왔는데 이번엔 그림이 아닌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갈증이 나서 올라간 전망좋은 카페에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시원한 음료를 건내주고 수줍어하던 아가씨들이 그러했고,
앵무새며 구관조를 키우는 젊은 사육사 친구는 처음본 저에게 한바탕의 재미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른 아트샵에서도 생각보다 허접한 물건들에 내심 실망을 하고 나오던 참에 직원 아가씨가 다가오더니
제 이미테이션 팔찌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것 제가 살 수 있나요?"
몇 푼 되지않는 가격의 싸구려제품이라고 암만 설명을 해도 제가 비싸게 부르지만 않는다면 끝내 사고야 말 기세라,
그냥 빼주면서 가지라고 했더니  연신 너무너무 좋아하는게 결코 밉지가 않았더랬습니다.
역시 발리에는 그 많은 신들만큼 착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 본관 건물 맞은 편의 카페. 바람이 잘 드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수줍음 많았던 카페의 아가씨들. 슬라맛 팅갈 ...-


- 이 친구가 바로 그 문제의 새 사육사이다. 부리로 쪼을까봐 겉으론 웃었지만 내심 조마조마해 하는 나에게"No Problem'
  을 외치며 무려 네마리의 새를 안겨주었다. 흐미...-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아트샵의 여직원, 왼 팔에 낀 팔찌가 바로 내 팔찌 ㅎㅎㅎ-

역시 우붓에 오니 참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거리의 이야기며 식당,마사지샵,그리고 푸리 루키산미술관과 엉겁결에 가게 된 파요간 리조트의 이야기는 결국 
따로 묶어야 할 것 같네요.
넉넉한 마음,느린 걸음으로 바라본 우붓의 하늘은 쾌청합니다.

 
  • woodaisy 2009.09.05 08:16 추천
    언제 보아도 그리운 우붓입니다.
    잘 봤습니다.
    훌륭한 미술관인데도 불구하고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우붓의 다른 3곳과 많이 비교가 되었던 뿌리 루키산...이제 공사도 다 끝났는지요.
    다음편 기대됩니다.^^
  • zeepmam 2009.09.05 14:45 추천
    블랑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역시나 꼭 가봐야 겠군요~~
    E.T액자?? 맞나요? 정말 실물이 너무 궁금해지네요.너무 유머러스하네요.ㅎㅎ
  • Yangachis 2009.09.05 15:45 추천
    유유자적의 여유로움이 묻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