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아빠
Lv.17
2009.09.05 21:02
추천:3 댓글:6 조회:3,327
세상을 탐험하는 것은 마음을 탐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중에서 -
-몽키포레스트 로드의 길거리 아트샵에는 이처럼 미니멀한 그림들이 참 많다. 작품성은 접어두고 너무나 유쾌하지 않은가?-
블랑코에서의 편안한 안식을 뒤로 하고 언덕길을 내려 옵니다.
하지만 길가에 서자, 이내 곧 다음 갈 곳이 막막해집니다. 역시 무계획은 빡빡함은 없는 대신 이렇듯 매번 망설임과
순간의 결정을 요구합니다.
지난번 식구들과 보타니카를 경험했던 추억이 참으로 좋았기에 그리로 갈까하다가 언뜻 누군가가 불충분한 정보지만
베로나스파를 극찬했던 기억이 떠올라 길가의 오토바이맨을 붙들고 물어봅니다.
"너 베로나스파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녀석은 천연덕스레 잘 안다고 대답을 하길래 "그럼 가자"고 했지요.
헌데 푸리 루키산 앞의 라야 우붓거리에서 골목으로 들어가 몇 번 돌더니 "여기서 내리세요. 저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니까요."하며 1만루피를 받기가 무섭게 줄행랑을 놓더군요.
왠지 찜찜한 기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젠장, 몽키포레스트 거리의 한복판 바로 코마네카 부근이었습니다.
- 작은 개구리 샵이라고 우습게 볼 집이 아니었다. 안에는 꽤 공들인 소품과 액자들이 과히 비싸지 않은 가격에 즐비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하나쯤 사고싶다는 욕심이 절로 동하는 곳이다.
제가 잘 못 말한건지, 녀석이 잘 못 알아들은 건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주위의 몇 사람을 붙들고 아무리 물어봐도
베로나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슬슬 배는 고파져 오길래 일단 민생고를 해결하는 게 우선일 듯 싶어 몇 발자욱 걸으니 지금의 제 신세에 딱 맞는
밥집이 나오더군요. "베이비 페이스." 이게 왠 일 입니까?
발리서프에서 몇 번 그 명성 자자한 이름을 눈에 익히며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리라 생각했던 배고픈 순례자들의
밥집이 지금 갈 곳을 잃고 지친 제 눈 앞에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을 줄이야...
들어서자 마자 종업원이 들고 온 메뉴판을 급하게 펼치니 정말 있었습니다. "For Hungry Man 오므라이스" ㅎㅎㅎ
질이 아닌 양으로 승부하는 오므라이스치곤 종류가 일곱가지나 (볼케이노,치즈,러시안,오스트랄리언 등)되어 잠시 고민하다
그중 제 입에 가장 만만할 것 같은 포모도로 로 주문을 하고 기다렸습니다.
헌데 잠시 후 들고 나온 남산만한 접시를 보고선 입이 다물어지질 않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곱배기의 곱배기쯤 되는 양인데 제가 사흘쯤 굶은 놈이 아닌 다음에야 두 손 들 수 밖에 없는 노릇이라
결국 간신히 1/3가량만 해치웠는데 나중에 영수증을 가져온 종업원 아가씨 왈 "남은 건 싸드릴까요?" 하더군요.
-코마네카 리조트와 아주 가깝다. 대로변이라 조금만 신경쓰면 찾기가 쉬울 듯.하지만 부디 잘 먹는 사람과 배고픈 이들만
가시길... 맛으로 먹는다기 보단 도전하는 자세로 드시면 될 것이다. -
-값이 싸다고 허름할 것이라는 편견은 버려라. 내부는 깔끔한 편이다. 환한 햇살이 그대로의 자연채광이 되어 늘 밝은
분위기를 지닌 식당이다. -
-이것이 바로 그 "For Hungry Man 오므라이스"의 실체이다. 보통사람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두 사람도 배를 두드리면서
먹을 양이다. 난 나중에 정원이녀석을 데리고 와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참,그리고 원하는 손님에겐 점포간판의 사진
처럼 "i love Bali'라는 글자를 케챱으로 써주는 이벤트도 있다. 연인과 함께라면 꼭 한 번 해보시길.-
반도 못 먹은 식사가 이렇게 포만감을 느끼게 하긴 또 처음입니다.
바람도 맑고 햇살도 좋아 그냥 일어나기가 아쉬워 또다시 책을 폅니다.
몇 장 읽다보니 나른한 식곤증이 밀려들고 다시 일어나 걸을 작정으로 나섰는데 바로 옆건물의 간판이 눈에 띄네요.
"블리스." 물론 네카뮤지엄 부근의 호텔스파인 블리스와 혼동이 되는 곳이라는 것은 알고 왔는데 그래도 어떤 델까싶어
들어가 봅니다. 헌데 실망스럽네요.
앞쪽은 전형적인 미장원처럼 머리손질을 하는 공간이고 뒤쪽에 몇 개의 침대가 놓여 마사지를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또
옹색하게 외부와 차단된 베스 하나가 있더군요.
실내가 이렇게 협소하다보니 1시간에 7만루피인 보디마시지의 가격도 싸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허름함을 인정한 뽀삐스의 싸구려샵들이 더 좋다는 게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 몽키포레스트로드의 블리스 스파&마사지. 스파는 절대 비추. 보타니카와 하늘과 땅차이. 발이나 전신마사지는 뭐 그저
그런 편인데 이렇다할 특색이 없는 편이라서...-
-잠자는 호랑이 "마칸 띠두르".제법 값나가는 공예품이 많은 가게인데 안에는 가내공장도 함께 있어 운좋으면 작업광경도
볼 수 있다.
- 라야 우붓 로드의 뿌리 루키산으로 가다 본 멋진 숲 속 식당 카페 로투스의 바로 옆집.들어가보고 싶었다. -
다시 길을 걷습니다.
보다가 힘들면 쉬고, 밥먹고, 그리고 기운이 나면 다시 걷는 이 여유가 더할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렇게 몽키포레스트 거리가 거의 끝나는 라야시타로드(축구경기장이 있는 틋막부근)를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Mr. Kim?"
발리에 온 관광객중에도 김씨가 참 많은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그냥 걸어보지만 연신 "Mr. Kim?" "Mr. Kim?" 은 반복되고
해서 돌아보니 어라, 로볏(그동안 로버트로 잘 못 불렀더라구요. 이번에서야 알았습니다.)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네요.
"어 너 왠일이니?"(묻고보니 웃깁니다. 걔야 늘 여기에 있는 가이드이고 나야말로 왠일에 해당되는 건데)
"손님들 모시고 왔어요. 언제 오셨어요?" "며칠됐어." "혼자 오셨어요?" "응"
이렇게 시작한 반가운 대화는 길바닥에 서서 계속 이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입니다.
여전히 부지런하고 부끄럼 많이 타는 숫기없는 노총각녀석은 제가 묵는 숙소와 집이 가까운 지라 저는 돌아가기 전에
언제 한 번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말로 아쉬운 인사를 대신 합니다.(녀석의 가이드일정이 꽉 차 시간을 잡기가 힘들었는데
돈 많이 벌어 좋겠다니까 또 웃기만 하더군요.)
짧은 만남 ,그리고 또다시 헤어짐 입니다.
-공사중인 푸리 루키산미술관 . 인부 하나가 짧은 휴식을 위해 밖으로 나와 막 담배를 피려하고 있다. -
- 인부와 공사자재를 보고 처음엔 휴관중인 줄 알고 겁이 났더랬는데 다행히 입구는 어수선하지만 여전히 전시와 관람은
진행 중이었다. -
이윽고 푸리 루키산에 도착했습니다.
루돌프 본넷이라는 네델란드 출신의 화가와 우붓의 왕자인 아궁 수카와티,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인연의 결실이 바로
푸리 루키산 미술관입니다.
이 미술관은 겉에서 보기엔 전혀 미술관같아 보이질 않고(주차장으로 오인됨)다른 개인 미술관처럼 이정표가 잘 되어
있지도 않아, 정말 찾아가려는 사람이 아닌 이상 100% 지나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니 사실 위치(왕궁이나 시장에서 채 5분도 안되는 거리)나 대로변이라는 접근성으로 본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을 법한 곳인데도 한적하기로는 으뜸일 것입니다.
-4만루피의 입장료(웰컴드링크포함이지만 여긴 투박한 작은 병으로 준다. 당연히 주는 이도 아가씨가 아니라 늙그수레한
아저씨, 그나마도 달라는 얘기가 없으면 액션이 없다.)를 내고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는 모습.미술관 안에는 작은 연못이
몇 개 있는데 수련이 너무나 곱다. 그리고 또하나 놀라운 사실은 마주 보이는 저 건물 안에 들어가면 우리나라 설화인
"나뭇꾼과 선녀"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 곳 전설이 그림으로 전시되어있다.-
- 또다른 전시관. 여긴 입구부터 벽화로 시작하는데 왼쪽편에 이 미술관 내의 유일한 화장실이 있다. 참고하시길.ㅎㅎㅎ-
-좌에서 우로 걷는 동선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전시관. 입구 좌측의 카운터가 웰컴드링크를 주는 마치 매점처럼 보이는
장소이다. 음료를 받아 우측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면 내 마음도 그림이 되어감을 느낄 수 있다.-
이 곳엔 아르마의 넉넉한 규모나 네카와 같은 다양성,그리고 블랑코의 화려함은 없었습니다.
그저 고즈넉한 조용함만 가득할 따름이고 외관도 여느 미술관과 달리 멋을 부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시실 안에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이곳 발리인들의 희노애락과 신화와 전설이 담긴 그림들이 주절이주절이 풀어놓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면
될 따름이니까요.
밖으로 몇 발자욱만 걸어나가면 세계 도처에서 온 외국인들로 북적이는 이 우붓의 한 복판에 이런 장소도 있네요.
- 2관 좌측면의 전면벽화. 발리인들의 삶은 이렇듯 땀흘리며 수고하는 단순함 만으로 충만하거늘...-
- 바다와 삶의 가장 진솔한 표현,그림은 더 이상의 말이 없다. -
- 최근작인지 밝은 파스텔톤으로 아융강의 레프팅을 담은 그림도 보인다. 관광객이 아닌 어린이들만의 레프팅은
현실에 대한 외면일까? 아니면 꿈이거나 동경일까? -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묘한 기분으로 푸리루키산의 계단을 내려와 큰 길에 다시 섰습니다.
이젠 어느 쪽으로 갈까?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데 마침 제 앞을 지나가던 차가 조금 전진해서 멈칫 서더니
"형님! 타세요."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앤디였습니다.
이 곳에서 저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뱃 속 편한(?) 여행자이지만 장기체류중인 앤디는 관광이 아닌 그걸 모티브로 하는
사업을 시작하고자 하루에도 몇군데씩의 리조트며 호텔을 방문하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 저를 봤다네요.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발리가 무슨 손바닥만한 작은 섬도 아니고 따지고보면 제주도보다도 3배나 더 큰 섬인데 이번 방문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의 중단없는 만남의 인연이 계속 작용하는 것만 같습니다.
점심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채(운전하며 버거로 대충 때웠다네요.) 강행군중인 앤디는 아직 한 군데 더 방문할 곳이
남았다며 함께 들렀다 숙소로 돌아가자길래 또다시 예정에도 없는 파요간리조트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네카를 한참 지나 뜨갈라랑쯤 거의 다가서야 파요간은 우측 숲 속 깊이 숨어있더랬습니다.
- 이 리조트에서는 바라보이는 모든 경치가 사진으로 담기에는 너무도 컸다. 본관 1층 가루다라운지에서 바라본 밀림.-
-마치 끝부분이 절벽처럼 착시현상을 주는 파요간리조트의 물맑은 수영장. 너무나 조용했다.-
리조트의 매니져와 성공적인 인터뷰를 마치고선 앤디와 저는 다시 사누르로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앤디 왈 "형님! 오늘은 별볼일 없는 짐바란 시푸드 대신 우리끼리 십시일반해서 새우나 사다가 구워먹죠?"라며
짐짓 제의해오길래 주저없이 O.K했습니다.
"마크로"에 들러 싱싱한 타이거 새우와, 겻들여 구워먹을 고기와 야채류를 장을 봐서 들어오니 미리 연락을 받고 이미
준비가 한창입니다.
앤디 말마따나 짐바란시푸드를 별 거 아닌 걸로 만든 새우의 맛은 훌륭했습니다.
게다가 곁들여 나온 생선조림은 메인 그 이상이었구요.
그렇게 주거니 권커니 하는 와중에 잘 생긴 젊은 분 하나가 불쑥 들어오더니 저를 보며 불쑥 "형님. 저 와얀입니다."하며
넙죽 인사를 청하더군요.
드디어 와얀을 만났습니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반듯한 인상의 생각마저 반듯한 친구입니다.
그 밤, 술이 아닌 발리와 우붓과 그림과 사람에 취해 밤늦도록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
전 식당까지 가서도 만나지 못했는데...ㅜㅜ
-
만나지 못한 대상이....?
오므라이스입니까?
설마 저일리는 만무하고... -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캄보디아에도 있고 우붓에 있는 모든 미술관에 그림이
있던데, 나무꾼이 옷 훔쳐내는 장면을 그린게 제일 유명하더군요. 인도 설화가 힌두와 불교 전파 경로를 타고 퍼진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서로 만나서 좋은거 있음 따라하고 특이한거 있음 구경하고 그러는게 지금이나 옛날이나 비슷했을 것 같은데, 그걸 보면 '고유'라는 건 없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
멋진 여행 이십니다. 여행에서의 만남은 즐거움이죠...
-
와우!!! 100% 정답인 해설을 덧붙여 주셨네요.
딱 맞아 떨어지는 말씀입니다.
문화란 상위와 하위를 가르는 차별의 눈이나 닫힌 마음으로 볼 게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보편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금홍이님의 예리한 덧붙임, 거듭 감사하네요. -
아...좋네요..
혼자라도 좋은 곳이 역시 발리..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