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Bali : 로비나(Lovina)의 추억.
“발리에 가면, 혹시라도 대합(clam)을 잡게 되면, 그러면 그 껍질 반쪽을 너한테 줄게. 바다 속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대합들이 살고 있겠지만 그 반쪽에 들어맞는 것은 원래 짝인 나머지 반 하나뿐일 테니까.”
자바(Java)에서 오래 머물던 나는 버스를 타고 길리마눅(Gilimanuk)을 지나 그리운 발리(Bali)로 넘어왔다. 긴 여행에 지친 상태라 떠들썩한 남부로 곧장 내려가는 대신 기력을 회복할 겸 조용한 북부에서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발리의 대표적인 흑사해변 로비나(Lovina)에서.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우리 마음에 드는 대합은 아마 찾기 어려울 거야. 너무 커서 물 밖으로 들고 나올 수 없거나 아니면 도저히 떼어낼 수 없도록 바위와 일체화되어버린 것들뿐일 테니까.”
우리는 함께 발리로 가는 계획에 대해 몇 번이나 말했고 어떨 때는 너무 자세히 말한 나머지 가지 않고서도 이미 구석구석 가본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내가 잡게 될 대합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꼭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다. 정말 멋진데.”
근사해. 그는 내가 들려주는 거의 모든 이야기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였다. 순진하고 귀여운 남자였다. 양말을 신은 채 샌들을 꿰고도 내가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발리에 가면 어디에 머무를지, 며칠째 되는 날 무엇을 할지까지 아주 상세하게 의논했다. 꾸따는 시끄럽고 스미냑과 케로보칸은 너무 휑했다. 우붓은 모든 사람들이 가려는 곳이니 제외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한적하고 평화로운 로비나는 어떨까. 파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 해변의 예쁜 코티지를 빌리도록 하자. 열대의 밤은 언제나 금방 지나간다. 밤보다 긴 낮 시간에는 무엇을 할까. 나는 주꿍(jukung, 발리 어부들이 사용하는 조그만 전통 목선)을 타고 먼 바다에 나가 다이빙을 하고 그는 해변의 야자나무 그늘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락(arak, 쌀로 빚은 무색투명한 술)과 라임 주스, 그리고 꿀과 얼음을 섞어 만든 칵테일을 마시면서.
“대합을 잡게 되면 위아래 껍질을 나눠 가지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둘을 맞춰보는 순간 기억이 살아날 수 있도록.”
나는 다이빙을 하는 동안 오래 전 약속에 대해 내내 생각했는데, 그래서 한눈을 판 때문인지 결국 원하는 대합을 찾을 수 없었다.
로비나는 화려하고 세련된 남부에 비하면 질그릇처럼 투박스러운 시골이다. 이곳의 해변에 산재한 작은 식당들은 꾸따나 우붓의 트렌디한 레스토랑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만큼 소박한 실내장식에 메뉴나 요리법도 매우 단순한 편으로 생선을 굽거나 튀기거나 찌는 것 정도를 선택하고 그 밖에는 변화를 준다고 해도 생선에 뿌리는 소스 두어 가지 정도가 전부였다.
“생선 말고 새우 없어요? 오늘은 새우를 먹고 싶은데요.”
바닷가의 어느 조그만 와룽(Warung, 싼 식당의 통칭)에서 날마다 밥을 먹었다. 마음씨 좋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끼니때마다 숯불을 지펴 석쇠에 생선을 굽고 신선한 터머릭(turmeric)과 고추를 즉석에서 갈아 아주 맛있는 삼발(sambal, 인도네시아식 고추 소스)을 만들어 주는 식당이다.
“요즘은 새우가 안 잡혀. 작년만 해도 꽤 잡혔는데. 그냥 생선을 먹도록 해요.”
식당의 노부부는 단골인 내게 친절했다. 주인인 어부 할아버지가 날마다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오니 끼니를 굶을 걱정은 없지만 그 이상을 바라기는 어려운 빈한한 생활이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지나가던 동네 도우넛 장수를 불러 식사를 마친 내게 꿀이 든 과자와 찹쌀떡을 사 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감사의 표시로 가지고 있던 셔츠를 한 벌 선사하니 노부인은 어디선가 낡은 돋보기와 가위, 실과 바늘을 가져와서 재빨리 옷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난 옷이 필요 없어, 이걸로 손자에게 줄 옷을 만들 거야.”
열심히 바늘을 놀리며 부인은 옆에서 코코넛을 굴리며 뒤뚱거리며 놀고 있는 어린애, 이제 겨우 걸을 나이가 지난 조그만 사내애를 가리켰다.
로비나를 보면 오래 전 발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대략 가늠할 수 있다. 1930년대 유럽계 예술가들을 필두로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등 인류학자를 위시한 서구 지식인들, 50-60년대 히피들, 그리고 70년대 이후 세계 각국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들면서 공항에서 가까운 발리의 중남부지역이 대대적인 변화를 겪은 것에 비해 로비나가 속한 북부는 전통적인 옛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발리에 산재한 수십 개의 대규모 특급 호텔들은 모두 남부나 아니면 중부지역에 위치할 뿐 북부는 검은 모래가 깔린 잔잔한 바닷가를 따라 조그맣고 컬러풀한 어촌들이 점점이 들어서 있고 최성수기라고 해도 호텔이나 식당들은 늘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 새벽에는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가 돌고래를 관찰하는 투어가 있고 낮에는 수영과 스노클링, 다이빙, 물놀이에 지친 사람에게는 머지않은 거리에 뜨끈뜨끈한 온천이 기다리고 있다. 밤에는 검은 하늘에 총총히 뜬 별을 세거나, 별(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맥주 빈탕Bintang은 별, 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이름이 붙은 맥주를 마시거나, 늙은 숙소 주인이 연주하는 가믈란 음악을 들으며 옛 추억에 잠기는 것이 주요 일과인 마을이었다.
완전한 평화 속에서 사흘쯤 지낸 나는 이윽고 기운을 회복, 남부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방이 완벽한 맥도날드와 뉴질랜드 스테이크에 호주산 포도주를 살 수 있는 쇼핑몰, 스시와 뎀뿌라를 파는 일식당과 흥겨운 나이트클럽들이 점점이 포진한 죄악의 마을로.
“조개껍질 사세요. 기념품으로요.”
로비나를 떠나던 날 새벽, 마지막으로 숙소 앞 바닷가를 산책하던 나에게 동네 꼬마 몇 명이 접근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예리한 눈빛이며 흥정실력이 벌써 아주 훌륭한 장사꾼들이다. 그 애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풀어 헤치니 온갖 모양의 조개껍질이 튀어나왔다. 전갈을 꼭 닮은 고둥, 불면 부우, 하고 기적소리가 나는 소라, 바다에서 잡아 올려 표백제에 담궈 새하얗게 만든 후 오랫동안 갈고 닦아 반짝반짝 윤기를 낸 조개껍질들이 가득했다. 발리에서 살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지만, 이런 물건을 파는 아이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난 그런 것 사지 않아. 필요하면 내가 직접 바다에서 찾을 거야.”
그때 어떤 아이가 한 명 나서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뒤집어엎었다. 뜻밖의 물건들이 내 발치에 한 가득 굴러 떨어졌다.
“대합껍질 사세요. 아주 싸게 팔아요.”
나는 소년 앞에 주저 앉아 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새하얀 대합들이었다. 바다 속을 헤매는 동안 내가 잡고 싶었던 바로 그런 것들.
“제가 직접 윤기를 낸 거에요. 사세요. 좋은 값에 드릴게요.”
비슷비슷한 크기의 하얀 색 대합들이 너덧 개나 되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한 손에 들어 보았다. 매끄러운 감촉의 조개껍질이 아주 묵직했다. 바로 이런 것을 잡고 싶었는데. 해변의 그늘에 앉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위하여.
“사세요. 아주 싼 값이에요.”
손에 들고 있던 대합껍질의 아래 위를 맞물려 보았다. 서로 꼭 맞았다. 아무리 비슷하게 생겼어도 같은 대합의 한 쌍이 아니라면 이렇게 완전히 들어맞기란 불가능하다. 하얀 표면에 소용돌이 모양의 분홍빛 무늬가 희미하게 박힌 아름다운 물건이다.
소년은 비싼 값을 불렀지만 결국 나는 그 대합을 샀다. 바다 속이 아니라 뭍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찾을 줄은 몰랐다. 대합 말고도 원뿔 모양의 소라고둥과 다른 조개껍질도 함께 샀다.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구입한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로비나에서 사온 조개껍질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틈이 날 때마다 가끔 손으로 굴려 보기도 하고 유리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집으로 놀러온 어린 조카딸은 조개껍질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깊은 바다 속에 하도 오랫동안 잠겨 있던 거라 여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야."
조카의 까만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손가락으로 꽃잎을 만지면 손에서 꽃 냄새가 풍기는 것과 비슷한 원리야. 바다 속에 있던 것이니 아직 바다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럼 그 소리는 점점 사라지게 돼?”
“그렇게 금세 사라지지는 않아. 어쨌든 아주 오래 바다 속에 있던 물건이니까.”
“얼마나 오래?”
“그건 나도 몰라. 몇 백 년, 어쩌면 몇 천 년.”
이제 막 여섯 살이 지난 조카에게 의미를 가진 것은 내일이나 다음 주, 기껏해야 이번 크리스마스 정도였다. 나는 그 애에게 소라고둥을 하나 선사했다. 조카는 하얀 대합껍질을 더 탐냈지만 주지 않았다.
그 후 대합은 오랫동안 내 책상 위에 남아 있었다. 늦게나마 약속을 지키는 것은 어떨까. 내 성실함의 목적을 알아준다면. 이제나 저제나 나는 용기가 별로 없었다. 비행기와 배, 버스와 말, 트럭과 수레를 갈아타고 사흘 내로 세상 끝까지 찾아갈 수는 있지만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합을 보관할 만한 다른 장소를 찾기로 했다. 물 속에 있던 것은 다시 물 속으로. 나는 마침 어항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완벽한 장소였다. 대합을 어항 속에 떨어뜨렸다. 빨간 테트라 무리가 하늘하늘 투명한 지느러미를 놀리며 그 위를 스치듯 헤엄쳐 지나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하얀 조개껍질 표면에 푸르스름한 물이끼가 엷게 끼었다. 눈처럼 하얀 조가비의 색깔이 점차 바래면서 내가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 후 몇 번이나 더 발리에 갔지만 로비나에 들리는 일은 다시 없었다. 그 조용한 마을은 모든 것이 편리한 남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스미냑의 패셔너블한 바에 앉아 대형 스크린을 보며 차가운 빈탕을 마시다 보면 섬의 북쪽에 놓인 그 검은 바닷가는 너무 깊고, 너무 넓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 느껴졌다. 세 시간이라는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게 느껴져서, 나는 아마 로비나에 다시는 가지 못할 것 같다.
그 곳이 진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때로는 한 시간 떨어진 곳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더 쉽게 느껴진다. 전화도, 편지도, 그럴 듯한 상상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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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감탄과 짧은 표현이 전부인 제게 또하나의 영화 한편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
하루키 소설 같아요.
멋진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진짜....
어느 작가의 수필 한 편을 읽는 것 같네요.. -
진짜 작가분 맞으세요^^
박정석님..
"용을 찾아서"의 한 부분이네요. -
"내 지도의 열두방향" 한부분이네요. '발리에서 생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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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저도 읽고 있는 "내지도의 열두방향~"!!!
또 여행을 꿈꾸게 하는 책중에 하나예요~
사진,.. 글... 모두 책 그대로네요~
직접 찍으신 사진들어였나봐요~ -
아... "내 지도의 열두 방향" 이라고요...
시간되면 이번 주말 서점 갈때 한권사서 읽어야 겠습니다... -
어머! 박정석님 이시군요!! (반색하며..
어쩐지 하면서 설마..했었어요..ㅎㅎㅎ
맞아요..[용을 찾아서]...^^ -
로비나....
꼭가보고 싶은곳...
저는 어째 번잡하고 편리한 스미냑보다,
답답하고 지루하다는 그곳에 더 가보고 싶을까요..
글을 읽으니 더 가고 싶어요..
언제나 갈수있으려나... -
정말 감동적인 글이예요...
많이 느끼고 갑니다.. -
페이건님 글 같다...했더니 맞군요...
페이건님 글을 읽으면 항상 소름이 돋아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둘을 맞춰보는 순간 기억이 살아날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한 사람과는 다시 볼 수 없었어야 되는 거지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소담스런 호텔에서 가족같은 분위기로 아주 편안했거든요...^^...
이주정도의 휴식이 주어지는 칠월이면 다시 갔다오고 싶어집니다...
가서 적도해를 바라보면서 다시금 아락 한잔과 시간을 되새김질해야겠습니다...^^...
참으로 맛깔스러운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