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아빠
Lv.17
2011.02.10 17:39
추천:3 댓글:2 조회:4,065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생각해보도록 하자.
먼저 최하급 여행자들은, 남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며, 장님이다.
다음 등급의 여행자들은,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들은, 관찰한 결과를 체험하는 여행자들이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여행자들은
체험한 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최고 수준의 여행자들은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습득한 뒤 집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하는 사람들이다.
삶의 여로를 걷는 우리들은 이 다섯 등급의 여행자로 나뉜다.
최하급의 여행자는 수동적인 인간이며,
최상급의 여행자는 습득한 모든 지혜를 아낌없이 발휘하며 살아가는
능동적인 여행자이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에서
PS : 저는 4등급도 힘겹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몇 등급에 속하십니까 ?
자고 일어났더니 정원이의 상태가 썩 좋질 않습니다.
간밤에 자꾸 뒤척이길래 머리를 짚어보니 미열이 좀 있더니만 새벽부터 열꽃이 더 오르는 모양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마누라도 거의 데프콘 1 수준의 전시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비장합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별달리 해 줄 것이 없는지라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에 올려주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다지 강행군을 했던 여정이 아닌데도 녀석이 탈이 난 건 딱이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아직 병원엘 갈 정도는 안되지만 혹시라도 싶어 여기저기 병원을 알아보는데 아침을 먹고 준비해 온 감기약을
먹이니 다행히 조금씩 차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 전날 까지만해도 숙소수영장에서 이렇듯 건방진 포즈를 취하던 꼬마한량이 졸지에 비맞은 병아리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마누라는 정원이의 간병모드에 돌입한 탓에 오늘은 두문불출하겠답니다.
그러면서 저더러는 나가서 실컷 구경이나 하다가 오라네요.
이제 며칠 남지않은 일정이라 좀더 보고싶고, 걷고싶은 제 마음을 마누라는 이미 알고도 남음이 있는 까닭이지요
게다가 함께 있어봤자 그다지 도와주지도 못하는 편이니 귀찮아서 등떠미는 마음도 있을 법한데 이거, 미안해 해야할 지
고마워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내 저는 차도가 나빠지면 전화를 하라는 당부만 남기고서 신발끈을 메고 거리로 나섭니다.
- 사누르 비치의 바로 안쪽 길을 따라가다보면 만나는 정경. 우측편엔 주로 호텔들이 자리를 잡고있는데 아무 곳이라도
그냥 걸어 들어가면 언제나 끝은 바다가 나온다.
애가 아프니 멀리 갈수도 없지만 사실 그럴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 바람과 햇살을 이고지고 걷기에는 가까운 사누르 해변 길이 제게는 딱이거든요.
길게 뻗은 안쪽 도로를 따라 걷다가 아무 호텔이나 마음내키는 대로 들어가 그 안을 관통하면 어디서나 바다로
나가는 길은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작은 갤러리들 사이에 석물과 주석으로 만든 작품들을 산더미처럼 내어 놓은 엔틱샵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길은 한산합니다만 걷는 사람은 늘 별로 눈에 띄질 않습니다.
다만 거리 군데군데 쭈그려 앉아있던 택시며 투어 호객꾼들이 저를 보자 반색을 하며 쫓아오지만 제 무반응에 이내
발길을 돌립니다.
- 마치 숲처럼 무성한 이솔라의 입구와 대비되는 근처의 함석지붕 길거리 갤러리. 거칠지만 풍자와 해학이 있는 그림
몇 점이 옛날 우리네 이발관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좀 더 걸으니 시장이 나옵니다.
헌데 이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현대식 시장이네요.(우리나라에 옮겨다 놓아도 마찬가지일듯)
지도를 보니 예전부터 시장이 있던 자리인 걸로 보아 최근에야 리모델링을 한 듯 합니다.
하지만 재래식 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청결과 깔끔함이 왠지 서먹하고 아쉬운 느낌을 가져옵니다.
- 넓고 쾌적한 공간을 취급하는 품목별로 구획해 놓았는데 각 점포 앞에 줄지어 도열한 쨔낭을 두는 제단이 이채롭다.
이 길에는 공방과 작은 갤러리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지만 워낙 그 규모가 작고 영세하여 꼼꼼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영낙없이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목마른 이에겐 카페가 우선이고, 맛사지를 좋아하는 이는 스파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제게는 보잘 것 없는 이런 가게들이 한 눈에 다가섭니다.
원래 사람의 눈이란 자신이 보고싶어 하는 것들만 보이는 법이니까요.
- 목공방 앞 양지바른 자리에 주인장이 나와앉아 열심히 작품을 만드는 중이다.
옆에 앉아 유심히 구경을 하다가 가게 안을 둘러볼 수 있냐고 묻자 그는 천천히 보다가 사고 싶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부르란다. 가게 안은 작지않은 규모인데도 나무로 만들 수 있는 발리의 모든 것들을 담고 있었다.
앉을 자리조차 없는 공간이니 당연히 그는 바깥에서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방을 지나 몇 발자국 옆으로는 길을 걷다가 누구든지 무시로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는 갤러리가 하나 있습니다.
안을 기웃거리는데도 인기척이 전혀 없습니다.
무슨 볼 일을 보러갔는지 문도 잠그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내어 보여주고 있는 진짜 열린 공간입니다.
작품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참에 그제서야 어디선가 커다란 캔버스를 잔뜩 싣고 온 트럭 한 대가 와닿습니다.
- 써놓은 간판만 아니라면 자판기를 비치한 동네 구멍가게로 보아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인물화와 풍경화에 피카소를 닮은 듯한 추상과 선반에 올려진 쟈코메티풍의 조각까지 보인다.
하지만 한가로움도 너무 지나치면 탈이 나는 법...
이렇듯 아무 생각없이 걷기를 지속하다보니 길을 잘못 든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누르 비치라 부르는 곳은 그랜드 발리 호텔 부근의 한정된 일부 지역이고 상세지도를(이 역시 일본사람이
만든 겁니다.) 보니 구분되는 작은 비치들이 꽤 여럿이더군요.
처음에 저는 그 지도를 보고 신두 비치까지만 걸으려했는데 그만 세가라 비치까지 더 와버린 겁니다.
바다가 보이길래 주변의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이구동성으로 "세가라 비치"를 외치더군요.
- 안쪽도로를 따라 저 길 끝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세가라 비치가 나왔다.
- 비치 바로 입구에 있는 세가라 리조트의 정문.
우리가 잘 아는 서양 속담에 "All roads lead to Rome."이 있습니다.
같은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는 많은 다른 길(방법)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듯이 발리에서는 모든 길이 바다로 통합니다.
설사 저처럼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해도 그 길을 거슬러 오르거나 내려가면 바다와 만나는 목적지가 나옵니다.
바다가 이정표가 되어주는 셈이지요.
- 해변가 앞에는 한 눈에 봐도 늙은 어부인 듯한 어르신의 입상이 서있었지만 인도네시아어는 젬병이라 해석불능...
- 정박된 쭈꿍 너머로 보이는 저 산도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 해변가를 따라 걷다가 발견한 거대한 바닷가재.(모형이지만 은근히 깜짝 놀랐다.)
- 해변 길을 따라 걸으니 입구에서 보았던 세가라 리조트의 멋진 뒷면과 맞닿는다. 여기도 완전히 서양사람들의 세상 ...
그렇게 걸어 올라가니 해변에서 뭍으로 갈라지는 큰 길 하나가 보입니다.
신두 비치로 나오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두 비치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는 않습니다. 걷기에 딱 알맞을 정도...)
여기는 아까 잘못 찾아들었던 세가라 비치 길보다 더 한산한데 골목길 풍경은 훨씬 더 좋네요.(좀 더 운치있는 모습 ...)
-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가 신두비치이다.
- 신두 비치 입구의 마하팔라 리조트와 골목길의 정경을 연출하는 리조트의 담벼락. 12지신상의 대형부조로 벽을 만들고
옆으론 세로로 된 줄고랑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도록 설치되었다.
- 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문신을 해주는 장소는 음습하고 어두운 곳인데 여기는 달랐다. 실은 저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할까 ? 말까 ? 하지만 결국 마누라의 "정신 나갔어" 소리도 겁이 났고 애는 아픈데 철없는 애비로
보일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며 뒤돌아섰다. 아쉬워라...
오전 내내 걸어다닌 탓에 점심시각을 훌쩍 넘겨서야 돌아왔습니다.
물론 점심은 못 먹었지요. 혼자인데 밥이 들어갈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죽을 챙겨 먹었다는 정원이 녀석은 기운이 되돌아 오려는지 시장하다네요.
하지만 데리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제가 다시 나갑니다.
택시를 불러 타고 카르푸엘 가서 2층 푸드코트를 누비며 열심히 테이크 아웃을 해 온 것이지요.
손발이 닳도록 돌보는 애미도 힘들지만 노는 것 같아보여도 애비노릇 역시 힘듭니다.
발리에서나 한국에서나 부모노릇은 힘든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