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후기
2011.11.18 17:23 추천:7 댓글:5 조회:3,289
balisurf.net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려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 지영의 산문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중에서


  저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면 밤이 되어야 돌아오는 여행자가 아닙니다.
  함께 묵는 다른 이들이 모두 나가고도 저는 서둘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은 뭘할까 하는 야무진 욕심보단 그날그날의 상황을 봐가며 움직이는 탓에 제일 늦게 나서고 제일 먼저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낮에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나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가장 자주 마주치는 게 이 집의 금쪽같은 아들내미 서진이녀석 입니다.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꼬맹이가 앙증스런 걸음마로 마당을 누비고 화단의 흙을 매만지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적인 그림인데 만만찮은 녀석은 제 부모가 아닌 다른 이들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더군요.
  단, 숙소의 살림을 맡아하는 아띠의 손길은 예외였습니다.

  만 두 살도 안된 녀석은 요즘 한참 말을 배우는 중입니다.
  헌데 부러운 건 간간이 그 작은 입에서 놀랍게도 "아버지"와 "어머니"소리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제 5학년인 정원이도 아직 존댓말을 제대로 못써서 혼쭐이 나는 데 말입니다.
  게다가 아띠와 놀다보니 자연스레 인니어도 함께 구사합니다.
  한국에서는 이제 영어열풍도 성에 안 차 bilingual(이중언어화자) 이나 trilingual(삼중언어화자)을 학습목표로 하는
  사교육마저 보이던데 발리에서 크는 작은 꼬마가 강요된 언어교육에 대한 정확한 반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레 익히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
  그리고 부모라면 초조함이 아닌 믿음을 지닌 채 뒤에서 바라보는 것 ...
  제가 알고있는 교육이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물론 너무 이상적이라는 이유로 정원이엄마는 타박을 해대지만 말입니다.

balisurf.net





  오늘은 숙소의 주변부를 걸어서 돌아봤습니다.
  스미냑이라면 보통 밤시간에 예약한 식당엘 와서 급히 저녁만 먹고 떠나거나, 가구점 거리 정도만 돌아봤기 때문에
  걸어서 보는 건 또 다를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걷다보니 여기저기 일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됩니다.
  개발에 한창인 나라인지라 도로도 파헤쳐놓고, 건물도 올리고, 집도 새로 짓지만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나이 어린 친구들의 모습을 적지않이 볼 수 있습니다.
  한창 공부할 나이의 청소년이거나 그보다 더 앳된 아이들의 삽질하는 모습은 그래서 볼때마다 무척 안스러웠습니다.
  힘든 노동의 중간중간에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모습은 그냥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부디 저 작은 조막손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 홀로 설 수 있기를 잠시 기원할 따름입니다.









  숙소에서 나와 큰 도로에서 왼쪽을 향해 올라가니 "망앵낑"이 보입니다.
  인근에서는 가장 소문난 현지스타일의 제법 큰 식당인데 아쉽게도 저는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 상대의 전통식당이라면 제법 고가일거고, 현지식이라면 길가의 허름한 와룽이 제게는 더 만만하니까요.
  그래서 그 위에 자리잡은 야끼니꾸 집이나 작지만 깔끔한 현지식당 "마미쿠킹"에서는 한번씩 맛을 보았지요.
  그 부근의 삼거리를 바라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아래론 규모가 작은 스미냑 까르푸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다 반대방향은 덴파사로 올라가는 지름길인지라 늘 차와
  오토바이들이 밀리고 매연이 자욱합니다.
  헌데 오토바이들이 신호에 걸리면 길가 노점에서 뭔가를 급히 사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노부부가 벌인 좌판인데 얇게 저민 슬라이스 아몬드(맞나 모르겠네요)를 신문지로 만든 봉지에 넣어 팔고 있습니다.
  때에 찌든 꼬깃꼬깃한 루피아 지폐와 기름범벅인 먹거리가 우리의 위생개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정작 사는 이나
  파는 이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 라는 일본 작가의 "인도방랑"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베르나르 올리비에 영감님처럼 넘치는 역마살로 인해 세계의 여기저기를 누비며 사진도 찍고 글도 쓰는
  7순이 다 된 노인장의 열정으로 가득찬 글입니다.
  그는 "정보가 많을수록 실상은 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준비성을 탓하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을 없애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녀왔던 기존의 가치관을 하나하나 허물고 새롭고 튼실하게 다시 구축하라는 것이지요.
  저는 실천으로 옮기기 힘든 거창한 말이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여행은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처음 보는 이에게 관대해지고, 낯선 일에 담대해지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지요.
  매번 오가는 출퇴근 길만 바꿔봐도 다른 풍경이 있고, 전철 안에서조차 다른 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또다른
  세상이 보이는 법입니다.

  다른 길에는 낮이라 아직 열지 않은 시장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았기에 관상용 조각들을 모아놓은 돌공장을 지나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사이 제가 온 이후 처음으로 다른 손님이 들어오셨는데 발리서프를 통해 ID를 익히 아는 분인지라 초면임에도
  영 낯설어 보이질 않습니다.
  혼자서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가 뭣해서 여쭤보니 일찌감치 드셨다길래 할 수 없이 소주 한 병을 옆에 꿰차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와룽자둘"을 찾아갑니다.
  현지와룽이야 술이라곤 맥주조차 안 파는데다 뜨끈한 소또 아얌 국물에는 알싸한 소주가 빠질 수야 없겠지요.
  외국인이 와서 먹는다고 밥도 고봉으로 국도 곱배기로 내어주는 걸 다 비웠습니다.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제일 좋아하는 건 밥집 아줌마입니다.
  사람사는 세상은 다 똑같은 법이니까요.
  
  • 행복하길 2011.11.22 03:50 추천
    그야말로 '발리' 본연의 모습이네요~
    멋진 후기, 잘 봤습니다~ ^-^
  • realhoya 2011.11.22 12:29 추천
    서두에도 말씀하셨지만 사진하고 글에서도 여유가 느껴지네요 ^^
  • 정원이아빠 2011.11.22 22:01 추천
    발리가 지닌 수많은 모습중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보았을 따름이지요.

    그것도 사실보단
    제 느낌을 너무 보탠 건 아닌가 싶은데...
  • danchung 2011.11.26 22:57 추천
    와,,, 눈에 익고 자주 스쳐가는 곳 사진이 많네요,, 그냥 스쳐 지나갈땐 무덤덤 했는데 이렇게 다시 사진으로 보니 느낌이 새로워요,

    망엔낑 집이랑 되게 가깝고 종종 가는 곳인데 여담이지만 여기서 삼발 먹다가 고막 터지는 줄 알았어요 ㅎㅎ 넘넘넘넘 맵더라구요,, 비오는 날 가면 분위기 넘 좋아요..

    여기 온지 일년이 넘었지만 가본 곳은 많이 없네요,
    그래도 발리와 인연이 닿아 여기서 머물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 zeepmam 2011.11.30 00:29 추천
    올리시는 사진들 보면 발리니스 삶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