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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기
2011.11.26 21:33 추천:6 댓글:8 조회:3,616


  (중략) 지금 비 내리는 바다에 나는 와 있다.
   내가 무슨 마도로스라고 날마다 그토록 바다를 그리워하였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조차도 없는 바다를.
   당신은 들리는가.
   비는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 한 번도 말 붙이지 못하고 애태우던 여자애의 음성,
   아니면 당신이 밤을 세워 쓰던 편지의 활자들이 이제야 다시 그대 주변으로 돌아와 떨어지는 소리다.
   소리는 곧 아픔이다.  양철 지붕 가득히 흩어지는 불면의 낱말,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이다.
   당신은 비 오는 날의 저문 거리에서, 한 사람의 낙오된 유목민처럼 아주 외로운 사람이 되어
   오래도록 우산도 없이 홀로 걸어본 적이 있는가.
   호주머니 속에는 당신의 남루한 방으로 돌아갈 시내버스 요금 밖에는 없고,
   그리하여 다실의 흐린 조명등 밑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침울한 육성을 들으며 쉴 수 조차도 없었던 날,
   정답던 친구 몇 명은 저희들끼리 바다로 떠나고
   잠시 사귀던 애인마저 출타하고 없을 때
   당신이 그 무엇을 만나게 되는 것은 오직 명료한 고독뿐임을...  (중략)
   통속한 유행가조차도 눈물겹게 들리면 문득 당신은 회상하게 되리라.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린 이름들을.
   그렇다. 진실로 우리가 망각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잠시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가슴속 저 알 수 없는 깊이에 방치해 두고 있었을 뿐... (중략)
                                                                                            - 이 외수의 "내 잠속에 비 내리고" 중 바다엽신 -
                                                                                         
  balisurf.net
   한동안 글 쓸 시간이 나질 않았습니다.
   아직 삽화같은 발리에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괜시리 바빳던 탓이었지요.
   물론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지만 계획에도 없던 남해안 항구도시로의 방문이 있었고, 아울러 친지의 이사와 정원엄마의
   생일까지 연달아 치루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글쓰기는 자연스레 뒷전으로 미루어지더군요.
   하지만 원고마감을 약속한 것도, 목을 빼고 기다리는 매니아를 둔 것도 아니지만 마음 한 켠은 과히 편치 못했습니다.
   중간에 멈춘다는 것은 아니함만 못함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 덜컥 가을은 영영 달아나버리고 매서운 추위가 코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이런 날씨에는 발리를 그리워할  분들이 꽤나 많음을 저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까닭없이 일도 손에 잡히질 않는데다 움츠러들기까지 하면 몰입의 정도는 점점 더 깊어갑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성립합니다.
   남쪽의 따뜻한 곳에서 사는 이들은 흰 눈으로 상징되는 겨울풍경에 똑같은 열병을 앓고 있을테니까요.
   그러고보면 내가 가진 것보단 남의 것에, 그리고 가까이 지닌 것보단 멀리 두고있는 것에 더 마음 쏠리는 게 솔직한
   인지상정인 것이지요.

   
   천지창조의 여섯째 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다지만 발리에서의 여섯째 날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요란했더랬습니다.
   밤새도록 내린 비로 새벽같이 잠을 깨어 방문을 열어보니 마당은 온 데 간 데 없고 풀장 하나가 새로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지붕의 우수관이거나 마당의 배수시설이 막힌 모양인데, 아침이 되니 그 많던 물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다행히 예전대로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맑게 개여 더이상의 비는 없을 듯 싶어 일찌감치 길을 나섭니다.

   저는 비단 발리만이 아니라 여행길에서는 어딜 가더라도 걷거나 대중교통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길 위에서라야 그 곳의 참모습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는 일종의 확신이기도한데 아직까지는 유효한 편입니다.
   길도 큰 길은 저어하고 작은 길이거나 샛길, 오솔길을 더 좋아합니다.
   큰 길에서는 볼거리들이 빨리 그리고 복잡한 양상으로 지나가지만, 작은 길에서는 천천히 때론 음미하고 생각까지
   보태면서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은 스미냑의 거리를 종횡으로 누벼볼 참입니다.
   잘란 라야 스미냑에서 잘란 르기안으로 이어지는 세로로 된 축과 만나는 가로의 길들...
   잘란 디야나뿌라, 잘란 아르쥬나, 잘란 빠드마, 잘란 멜라스티...
   이 작은 길들은 모두 그 끝에서 바다와 만난다는 공통점을 지녔기에, 걷다 힘이 들면 바다를 보며 쉬어도 좋고
   영 싫증이 나면 윗사진의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아예 바닷길을 걸어도 그만일겁니다.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잘란 아르쥬나의 바닷쪽 끝인 르기안비치의 입구입니다.
   저도 꽤나 서둘러 나온 편인데, 부지런한 서퍼들이 먼저 바다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도 해변과 길 사이엔 키낮은 담장으로 경계를 해놓았지만 둘은 만났다가 헤어지길 거듭하니 굳이 이쪽과 저쪽의 
   나눔은 어쩌면 무의미하게도 느껴집니다.
   한참이나 바다를 서성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그제서야 "코쿤"이 보이네요.
   상아색의 건물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제법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해저물녘 석양과 간접조명 아래 고급클럽으로
   변신하는 밤의 실루엣 또한 어느 정도는 상상이 됩니다.
   몇 발자욱 더 걸으면 나오는 번지점프 타워도 늘 방송국중계탑을 연상케하는 그대로의 모습이구요.




   바닷길의 북쪽을 따라 올라갈수록 해변은 점점 한산해집니다.
   흔히 해변을 따라 가다보면 줄곧 나오는 식당이며 카페들도 여기서는 드문드문 자리잡은 외로운 단수의 모습입니다.
   비치에는 잠시 쉬었다가 떠날 길손이라도 기꺼이 맞아줄 텅빈 선-베드 몇 개만 놓여있는데 저만치서 낮은 엔진음과
   함께 해변의 청소차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묵묵하면서도 익숙한 작업을 바라보는 중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옵니다.
  "아리가또."  이런이런...  어느 눈나쁜 녀석에게 또 일본사람으로 보인 모양입니다.
   돌아다보니 껌을 질겅질겅 씹는 젊은 백인녀석 하나가  보드를 옆에 끼고 서 있습니다.
  "날 불렀니 ? 난 한국인인데..."  영어로 대꾸하자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네요.
  "혹시 서핑보드 배울 생각없니 ? 나한테 배우면 싸고 쉽게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아버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촌뻘은 되고도 남을 나이차이임에도 녀석은 내내 반말입니다.
  "난 보드 배울 생각없거든."  저는 단호히 거절을 했지만 녀석은 줄창 따라오며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아마도 여행와서 돈이 떨어진 탓에 제 딴에는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레슨을 하려는 모양인데 사람을 잘못 본 것이지요.
   그러는 동안, 모처럼 나온 햇살은 점점 따가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빠져나온 바닷길의 끝은 잘란 디야나뿌라 거리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거슬러 위까지 올라가는 코스가 되겠네요.
   간간이 보이는 길거리의 식당은 늦은 브런치를 즐기는 서양인 커플 몇몇만 보일뿐 인적없는 거리엔 내려쬐는 햇살만
   가득합니다.
   저 또한 등에 땀이 배이고, 잠시 쉴 곳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을 끄는 간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폴 메카트니와 죤 레논, 죠지 해리슨에 링고 스타의 사진이 나란히 걸린 "d Base"라는 까페였지요.
   그다지 특별할 거라곤 하나도 없는 그 곳엘 들어서자 특별한 음악들이 흘러나옵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오히려 애잔함을 느끼게되는 "Let it be"에, 지직거리는 기계음의 무전기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Yellow Submarine"이며... 뜻밖에도 제 귀가 횡재를 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스미냑의 작은 까페에서 아이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만나는 비틀즈는 그야말로 축복과 행운이었던 셈이지요.
   조금전까지 느꼈던 더위와 피곤, 갈증과 허기는 모두 떠나고 그 빈 자리마다 느긋한 넉넉함이 스며듭니다.
   고작 30분의 휴식으로도 이순간 저는 "스미냑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여유 때문이었을까요 ?
   다시 길을 나서서 얼마쯤 걸어가는데 난데없는 음악소리가 들려옵니다.
   차를 탔거나, 급하게 서둘러 가는 길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겠지만 시간에 떠밀릴 일도 없고 충분한 휴식까지
   취했으니 저는 소리의 행방을 쫒아갑니다.
   음악은 길가의 골목안 작은 호텔 "Fave"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소리만 있는 게 아니라 흔치않은 볼거리마저 함께 합니다.
   다름아닌 페이브 호텔의 고사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지요.
   우리가 집이나 차를 새로 장만할 때 지내는 고사처럼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호텔의 주인이 바뀌었다니까요.
   사제인 브라만이 높은 제단 위에 앉아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고, 또 공연도 합니다.
   심지어는 현지에서 꽤 알려진 남녀배우들이 와서 행사진행을 맡아 보더군요.
   처음에 저는 정중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여기서도 흔쾌히 반겨주더군요.
   그런데 잠시후 사회자가 로비에 앉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가장 멀리서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
   한동안 웅성거림 끝에 쟈카르타, 말레이지아, 싱가폴을 외쳐댑니다.
   그때 제 옆에 있던 인디아풍의 범상치않은 노인이 제게 묻더군요.
  "손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 순간 저는 당황했지만 이내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저는 투숙객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제게 제일 앞쪽의 상석에 나와 앉을 것을 청하고 무엇이든 보고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더군요.
   맞습니다. 투숙객은 아니더라도 제가 제일 먼 곳에서 온 손님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인은...
   맨 아래 사진의 주인공, 바로 새로 바뀐 페이브 호텔의 사장님이더군요.
   
   유쾌한 축제에 뜻하지않게 초대받은 가장 먼 곳에서 온 손님,
   이것도 발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다른 축복이 아닐까요 ?
   나시 티를 입어 드러난 살갗은 시간이 갈수록 화끈거렸지만 즐거운 기억이 내내 아픔을 상쇄합니다.
   

  






  • yud 2011.11.29 13:16 추천
    이벤트에 당첨되셨군요 ㅋㅋㅋㅋㅋ 후기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청아 2011.11.29 16:06 추천
    몇곳은 매번 낯익은 곳이...몇곳은 아주 낯선 곳이...
    발리에서 저도 매번 하는 일이 걷기인데...^^...
    정원이 아버님의 사진속에는 더 내밀한(?) 무엇인가가 느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 prismd 2011.11.29 17:04 추천
    목을 빼고 기다리는 매니아 있습니다. ^^
  • 정원이아빠 2011.11.29 18:01 추천
    그게 이벤트였나요 ?
    이벤트라면 뭐라도 줘야하는 거 아닙니까? ㅎㅎㅎ
    숙박권이나 할인혜택
    하다못해 눈깔사탕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제일 앞 깊숙한 장의자에 걸터앉아
    색다른 구경을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흡족합니다.
  • 정원이아빠 2011.11.29 18:11 추천
    과분한 찬사입니다.

    오히려 청아님이 올린 글을 보면
    검정연필의 내공과
    각별한 마음씀씀이를
    훨씬 더 느끼겠던데요.

    똑같이 걷더라도 조금 다르다면
    그건 걷기의 방식이 아니라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좀 더 들여다보고자 했던
    제 욕심의 크기겠지요.

    그래서
    어찌보면 제 글은
    내밀함이 아닌 내숭일 것도 같습니다.
  • 정원이아빠 2011.11.29 18:13 추천
    ㄳ ㄳ

    어쩌죠 ?

    이제 마무리할 하루치만 남았는데...

    한참 잊었다가

    내년 초에나 다시 올리도록 하지요.
  • zeepmam 2011.11.30 00:35 추천
    와~~ 좋은 경험 하셨어요 ~~
    부럽습니다 ^^
    발리에도 우리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구요
    역시 정원이 아버님께 발리신들은 너그러우신가봅니다 ~~
  • 정원이아빠 2011.11.30 10:31 추천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배움의 길고 짧음이 가로막아도
    사람사는 세상은
    대부분 비슷한 모양입니다.

    발리의 신들은
    저한테 뿐만 아니라
    zeepmam님과
    발리를 사랑하는 모두에게도
    너그러울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