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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기
2006.02.26 00:25 추천:22 조회:1,501
마일리지 선물 감사합니다~ 필 받아서 계속 올려요. 자기 전에 다 올려볼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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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4. 넷째날 : 아멧, 띠르따강가


날이 밝았다. 내 생일이다. 사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생일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모기장을 잘 내려치고 공주침대에서 잤건만, 모기 때문에 밤새 고생을 했다. 바르면 모기를 쫒아낸다는 약을 가져와 잔뜩 발랐지만, 그건 발리 모기에겐 안 먹히는 듯 했다. 밤새 귓가에서 윙윙대지, 여기저기 벅벅 긁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골이라 그런지 모기가 많긴 많구나. 침대 옆에 전기 모기향이 있었다는 걸 떠나는 짐을 쌀 때에야 발견했다. 나 원... 이걸 모르고, 우리는 오늘 밤도 모기에 열심히 피를 빨리게 된다.
으악!!! 잠 깨자마자 거울을 봤다가 내가 지른 비명 소리다. 글쎄, 모기가 눈두덩이를 물었다. 가뜩이나 왼쪽 눈은 쌍꺼풀도 없는데... 가뜩이나 눈이 작아 콤플렉스인데... 이 동네 사람들 시원시원 눈이 커서 가뜩이나 부러워 죽을 것 같은데... 내 눈을 물었단 말야? 정말 예의없는 모기네. 발바닥, 손바닥 무는 모기가 세상에서 가장 예의없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왼쪽 눈이 거의 안 떠진다. 우와~ 내가 봐도 내 눈 진짜 웃긴다. 이 눈을 하고 어떻게 돌아다닐 것이냐.. 한숨이 끊이질 않지만, 인트 오빠가 사진은 오른 쪽 얼굴만 찍는다고 약속해 주었기 때문에 길을 나서기로 했다.

 

- 가는 길에 본 아멧의 멋진 바다

오늘은 아멧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띠르따강가Tirta Gangga에 가기로 했다. 숙소 아저씨한테 얘기를 해서 차랑 운전사를 미리 구해 두었었다. 아침을 먹고 10시 쯤 나서려는데, 인트 오빠 어제 오토바이 타면서 손목 삐끗한 게 계속 아프다고 한다. 파스라도 하나 붙이면 괜찮을 것 같아 약국도 들르기로 했다.
오늘 우리와 함께 띠르따강가에 다녀올 운전사는 살릿이라는 젊은 친구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친절한 친구였다. 게다가 에어컨이 나오는 차까지! 오랜만에 에어컨 나오는 차를 탔더니 괜시리 신이 난다.
아차, 약국에 먼저 들르기로 했지. 약국이 영어로 뭐더라.. drugstore? pharmacy? 한참을 말해도 살릿이 잘 못 알아듣는다. 여기 발리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 익힌거라, 어려운 단어나 잘 쓰지 않는 단어로 얘길하면 잘 못 알아듣는다. 결국 전자사전으로 보여줬더니 알겠나보다. "아포텍!" 한다. 이게 약국인가 보다. (나중에 찾아보니, apothecary라는 단어에서 온 말인 것 같다.)


띠르따강가 가는 길에 암라푸라Amlapura 라는 도시를 지난다. 살릿의 설명으로도 여긴 도시 라고 하던데, 확실히 깨끗하게 구획되고 세련된 분위기가 난다. 거리가 호젓한 맛이 있어 여길 거닐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약국에 들러 바르는 약을 사고 내려가는 길인데, 살릿이 근처에 왕궁이 있는데 보고 가겠냐고 묻는다. 보고 갈 거냐고? 물론이지.
첨엔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 왕궁인지도 모르고 내렸는데, 내려 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하지만, 보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세월의 흔적만 쌓여가는 듯하다. 우리가 들어가니 관리인 인 듯한 아줌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를 따라 다닌다. 왕궁이라고 하기엔 좀 소박한 곳이었는데, 몇몇의 유물들과 사진들만이 옛 기억을 지키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인과 나란히 서 있는 왕의 사진을 보며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이곳의 역사가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사진 보실래요? : 암라푸라 왕궁 )

- 암라푸라의 왕궁


- 계단식 논

차에 올라 달리니 다시 시골길로 들어선다. 꼬불꼬불 산을 따라 올라 가는 길, 계단식 논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살릿은 친절하게도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전망 좋은 곳마다 사진 찍겠냐고 묻는다. 둥글게 내키는 대로 구획이 된 층층이 논밭들은, 그 이치를 모르는 나로선 제멋대로 자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느 정도 크기로 층을 내 잘라 버릴 것인가, 어디까지가 1층이고 어디부터가 2층인가. 작은 땅뙈기들이 저마다 제 뜻대로 제 사연대로 만들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논밭 사이로 간혹 허수아비들도 보이고, 작은 오두막도 보이고, 곳곳마다 사당도 보인다. 일면 밋밋해 보이기도 하는 농촌의 풍경들이, 이국의 풍경이라 그런지 마냥 신선하다.

 

 

 

 

( 사진 보실래요? : 발리의 계단식 논)


띠르따강가는 이런 계단식 논이 즐비한 산간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암라푸라의 왕이 만들었다는 물의 궁전, 사실 물의 정원이라 보는 편이 더 알맞을, 그 곳이 마을 한 가운데 콕 박혀 있다. 오기 전부터 사진으로 계속 보았던 터라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직접 물을 보니, 물냄새가 가득한 곳에 서 있는 조각상들을 보니, 그 감흥은 말로 표현이 안된다. 하나하나 눈으로 바라보며, 카메라로 응시하며 물가를 거니는 맛은 구름을 걷는 듯하다. 인트 오빠와 나는 한 시간 여를 여기서 보내는 동안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물소리 나는 궁전은 말을 다 삼켜 버렸다.
후두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길래 점심을 먹으며 비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물의 궁전 한켠에서 호텔을 함께 겸하고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음식맛은 그저그렇지만 전망은 좋다는 얘길 들었는데, 과연 그렇다. 테라스에서 비내리는 궁전을 쳐다보니, 시원한 바람도 불어 신선이 따로 없다.

( 사진 보실래요? : 띠르따강가 )

- 띠르따강가 전경, 비 올거 같네.

- 차낭사리 놓던 아이의 나비같던 손

평범했던 나시고렝을 먹고 나서 좀 더 걸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물의 궁전 가장 안쪽에는 너른 마루가 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낮잠도 자고 담소도 나눌 만한. 뒤를 한 바퀴 돌고 있는데, 저 쪽에 한 소녀가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지나간 그 아이는 큰 조각상 앞에 멈춰 꽃바구니를 내려놓는다.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발리에선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발리가 신들의 섬이라고 불릴 만큼 집집마다 사당이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를 드리고 의식을 올린다. 바나나잎으로 만든 조그만 바구니에 색색의 꽃을 정성껏 담아 바치며 기도를 드린다. 가게 앞에도 길가에도 차에도 오토바이에도 조각상 앞에도. 이 바구니 천지다. 발리는. 이 바구니를 차낭사리라고 한다. 색색의 꽃과 때론 밥을 담아 내고, 꽃잎을 손가락에 끼고 향기를 내고, 성수를 뿌리고 기도를 한다. 그 손가락 손가락 움직이는 것이 나비가 너울거리는 것 같아, 옆에서 차낭사리를 올리고 있으면 의식이 끝날 때까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 착하게 생겼던 그 소녀가 조각상 앞에서 의식을 올리는 동안 멍하니 감동받고 있던 우리는 사진 찍어도 되느냐는 시늉을 했다. 사진기를 보며 수줍게 웃던 그 아이. 선해 보이던 그 눈망울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 사진 보실래요? : 발리 곳곳의 차낭사리 모음 )


띠르따강가에서 돌아오는 길. 살릿이 내일은 뭐하냐고 묻는다. 내일은 우붓으로 간다고 하니 운전사는 구했냐며, 자기랑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오늘 하루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고 해서 가격만 괜찮으면 그러자고 했다. 가는 길에 브사키 사원이라는 큰 사원이 있는데, 봤냐고 묻는다. 브사키 사원은 발리에서 가장 큰 사원군으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 명성만큼이나 호객꾼과 가이드가 요구하는 각종 비용들 때문에 적잖이 피곤한 곳이라고 들었었기 때문에 우린 이번 여행에서 계획하지 않았던 곳이다. 굳이 갈 생각은 없었지만, 가는 길에 겸사겸사 들를 수 있다고 하고, 대표적인 사원을 하나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내일 우리가 그렇게 후회하게 되리라곤 이때는 미처 몰랐다.ㅜ.ㅜ
여하튼 대강의 흥정을 끝낸 후 살릿이 또 오늘 밤에 와와위위1 레스토랑에서 라이브 공연이 있으니 시간나면 보라고 권해 준다. 자기 친구가 나온다면서. 그래?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그러지 뭐.

숙소로 돌아오니 또 한바탕 비가 내린다. 발코니 간이침대에 누워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 보았다. 숙소 여기저기 사진도 찍고 해변으로 내려가 걸어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냥 하릴없이 쉬는 것만으로도 좋다. 원체 뒹굴뒹굴거리는 걸 좋아하는 게으른 성격이지만.

- 돌아와 휴식, 나도 그들도

- 마사지 권했던 아줌마, 멋지게 웃던.

자, 이제 슬슬 저녁이나 먹으러 가 볼까. 진짜 살릿 말대로 라이브 공연이나 볼까나. 와와위위1은 한 20정도 떨어져 있으니 천천히 산보나 하다가 시간 맞춰 가면 되겠다.
어제 오토바이를 타고 갔던 길을 이번에 걸어 보았다. 언덕 밑으론 바다가 쏴아 거리고 거리는 걷기 딱 좋은 만큼 오르막에 내리막이다.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길을 걷고 있는데, 산에서 야채를 잔뜩 머리에 이고 한 아주머니가 내려 오신다. 지나가면 할로 하고 인사 했더니 또 줄줄이 묻는다. 어디서 왔냐, 어디서 묵고 있냐, 등등. 아줌마의 용건은 가장 마지막이다. 내가 발리니스 마사지를 잘하는데, 마사지 안받아 보겠느냐. 헤헤. 이젠 익숙해질만도 하다. 노 탱큐. 웃으며 말하자 아주머니도 활짝 웃으신다. 굳나잇.


공연은 7시 30분부터라니까 이제 식당으로 가야겠다. 와와위위1에 들어가니 우리밖에 없네. 에게... 이래도 공연을 하려나. 음식을 기다리며 테이블을 둘러보니 작은 그릇에 물이 담겨 있고 촛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그 물에 빨간 작은 꽃이 동동 떠 있다. 네 개의 잎이 마치 바람개비처럼 예쁘게 나있는 이 작은 꽃이 너무 예뻐 꽃이름을 물어보았다. 발리 사람들은 이 꽃을 링깃 플라워라고 부른단다. 그러고는 잠시만요 하더니, 정원에 나가 나뭇가지를 우둑 하고 뜯어온다. 세상에, 나뭇가지에 하나 가득 링깃 플라워가 모여 있다. 마치 수국처럼 작은 꽃들이 다발로 모여 있는데, 맑은 붉은 색 꽃이 무척 아름답다. 우와, 감동이다. 발리 사람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 주나 보다.
저녁을 다 먹고 맥주를 마실 때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어디서 얘길 듣고 다 찾아오는 걸까 궁금하다. 공연하는 밴드는 모두 4명. 드럼 치는 사람 하나에, 베이스 한 명, 기타가 둘이다. 기타 치는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노래를 하는데, 노래하며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유유자적이다. 목소리는 평범했지만 낯선 곳에서 듣는 노랫소리는 좋고 나쁘다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 사진 보실래요? : 발리의 꽃들 )

- 와와위위1에서의 공연

- 여행, 발에 꼭 맞는.

식당을 나서니 사위가 온통 깜깜하다. 헤헤. 미리 준비해 온 손전등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손전등 작은 불빛에 의지해 함께 팔짱끼고 돌아가는 길.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것. 그게 가장 큰 선물이다.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니 생각만큼 별이 많지 않았다. 날이 흐려 그런가. 좀 실망인데, 하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순간. 엄청난 별들을 보았다. 산에 띄엄띄엄 자리한 집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시골 동네, 산위에 박혀있는 보석같은 불빛들. 캬~
우리의 밤은 이렇게 깊어간다.